교황 율리오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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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콘스탄티우스 1세에 의해 소집된 교회회의에서 아타나시오의 주교직 박탈이 재차 확인되었으며, 이단자 [[아리우스]]의 주장들이 채택되었다. 그 후 율리오 1세는 난국을 타결하기 위해 [[일리아]]에 아르키다무스와 필록세누스를 사절로 파견하여 [[사르디카 교회회의]]를 소집하였지만, 동방 주교들은 겨우 76명만 참석하였다. 다른 동방 주교들은 서둘러 [[필립폴리스]]에 모여 [[필립폴리스 교회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 회의에서 그들은 아타나시오와 다른 주교들을 단죄하여 그들의 주교직 박탈을 재차 확인하였으며, 또한 율리오 1세에게 로마 주교직에서 물러날 것을 결의하였다. 에우세비우스의 지지자들은 교황 사절들과 접촉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갔으며, 남아있던 300명의 주교들은 이전 로마 시노드의 결의를 재차 확인하고 율리오 1세와 아타나시오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로마에 상소할 여러 규정을 결정하였다. 아타나시오는 346년 그레고리우스가 사망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의 허락을 받아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율리오 1세는 352년 4월 12일 선종하였으며, 그 뒤를 이어 [[교황 리베리오|리베리오]]가 로마 주교로 착좌하였다. 율리오 1세는 훗날 가톨릭교회에 의해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되었다.
 
한편 율리오 1세는 350년부터 12월 25일을 예수의그리스도의 탄생일로서 축하하는 행사를 개최했다. 이때부터 [[성탄절]]이 생긴 셈이다. 본래 12월 25일은 고대 로마인들이 숭배하던 태양의 신 [[미트라]]를 기념하는 명절이었지만, 그리스도야말로 참 태양이라는 의미에서 이날이이날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채택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pauline.or.kr/catholic/dogma/pop_with_data.php?no=121
|제목=크리스마스 그것이 알고싶다
|저자=우광호 기자
|작성일자=2001-12-23
|확인일자=2001-12-23
|출판사=평화신문
}}</ref> 또한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린 날을 3월 25일로 지정했고, 완벽한 그리스도의 삶은 꽉 찬 기간 동안이었으므로 수태도 3월 25일이라고 보았다. 그리스도가 성모 마리아의 뱃속에 잉태되어 9개월 동안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탄생일은 12월 25일이라는 계산도 나왔다.<ref>{{뉴스 인용
|url=http://weekly.hankooki.com/lpage/coverstory/201212/wk20121220174059121180.htm
|제목=[금주의 역사/12월 25일] 예수의 탄생
|저자=이상준 기자
|작성일자=2012-12-20
|확인일자=2012-12-20
|출판사=한국일보
}}</ref>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