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스기 겐신: 두 판 사이의 차이

21 바이트 제거됨 ,  8년 전
* 겐신과 그밖의 다른 [[다이묘]]와의 철포(조총), 활, 기마 등의 군사 편성를 비교하면 별차이가 없고, 전술적으로도 크게 다를 것 없다. 하지만, 우에스기 군은 적과 적이 서로 부딪치거나, 직접적 전투에서는 압도적 위력를 자랑한다. 그것은 겐신의 정확한 전술 안목과 신출귀몰한 속공, 카리스마로 넘치는 지휘통솔력의 차이라 하겠다. 지휘관으로서 겐신의 재능은 비상하리만큼 뛰어나다고 말할 수 있겠다.
* 정치명에 관해서는 결코 악정을 했다고 할 수 없고, 면밀히 계획된 금광 운영으로 많은 이익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싸움에는 뛰어나고 내정에는 서툴다"는 것은 명확히 오해이다. (보충해서, 겐신의 연공 수입이 높을 때 추정 99만7천 석, [[다케다 신겐]]은 추정 83만5천 석으로 최전성기 때는 100만 석이 넘는다. 경제력은 양자 모두 호각세를 이룬다.)
* [[오다 노부나가]]<sup>{{Tooltip||織田信長}}</sup>, [[도요토미 히데요시]]<sup>{{Tooltip||豐臣秀吉}}</sup>는 전국시대를 종언한 지도자지만, 전술적 면에서는 겐신에 미치지 못한다. (실제, 오다 군은 겐신에게 데토리가와 전투에서 완패했었다. 단 노부나가는 이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았다.) 특히 무모하고 잔인한 성격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가 겐신이였다.
* 야전에서의 전광석화로 신(神)적인 지배를 하는 데 비해, 공성전에서는 실패로 철퇴하는 일이 꽤 있다.([[오다와라 성]]<sup>{{Tooltip||小田原城}}</sup>, [[우스이 성]]<sup>{{Tooltip||臼井城}}</sup>, [[가라사와 산성]]<sup>{{Tooltip||唐澤山城}}</sup>등), 겐신을 전국 굴지의 전술가라 할 수는 있어도 전국 최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우에스기 겐신 부정설도 있다.
* 의(義)를 중시해서 겐신은 사리사욕으로 병사를 움직이지 않았다. 전국 다이묘로서 있을 수 없는 금욕적인 면은 [[라이 산요]]가 격찬했고, 현재에도 겐신이 [[센고쿠 다이묘]] 중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이다. 한편 유명무실한 간토칸레직을 계승하였다는 점부터 형식에 얽매여있는 사대주의자, 혹은 대의명분을 방패로 자기정당화를 하는 것과 관련, 자신을 [[비사문천]]의 전생이라고 믿는 등, 자기애가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 겐신은 의리가 투텁고, 약속한 일에 대한 자세는 대단히 유명해서, [[호조 우지야스]]는 그에 관련해서 "신겐과 노부나가는 겉과 속이 항상 같지 않다, 부탁할만한 인물이 못된다. 겐신만은 보증을 선다면 백골이 되더라도 의리를 지키는 인물이다. 그런 까닭에 속옷을 잘라서 젊은 장수의 부적으로 쓰고싶다."라고 말했다 한다. 또 [[다케다 신겐]]은 죽음에 이르러 가쓰요리에게 "겐신은 의리가 깊은 장수로 사람이 부탁하면 결코 지나치는 일은 없다. 내가 죽은 후에 겐신을 의지해라."라고 유언했다고 [[고요군칸]]<sup>{{Tooltip||甲陽軍鑑}}</sup>에 있다.
* 간토칸레직도 쇠퇴해버린 무로마치 막부의 직위에 계속 얽매여, 아무런 이익도 나오지 않는 간토로 출진하거나,(이것에 관해서는 최근 수 년간 연구에서 겨울철에는 비교적 다뜻한 간토로 남하해서 약탈할 목적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전에 후계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 등로 본다면, 전략적인 평가는 결코 높지는 않다. 특히 후계자 결정이 되지 않았던 일로 인해 겐신 사후, [[오타테의 난]]<sup>{{Tooltip||御館の亂}}</sup>이 일어났다. 그것은 우에스기 가문 측에서는 큰 손실이 되고, 이후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겐신 시대에 획득한 북국의 대부분은 후에 [[시바다 가쓰이에]]에 의해 빼앗긴다.
 
== 묘소, 영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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