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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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부석 설화 ==
 
[[망부석]](望夫石) 설화는[[설화]]는,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그리워한 박제상의 부인에 얽힌 설화이다.
 
[[삼국유사]]》의 〈내물왕(奈勿王)과 김제상(金堤上)〉편의 중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 王旣見寶海, 益思美海一欣一悲, 垂淚而謂左右曰. 如一身有一臂, 一面一眼, 雖得一而亡一, 何敢不痛乎. 時 堤上聞此言, 再拜辭朝而騎馬. 不入家而行, 直至於栗浦之濱, 其妻聞之, 走馬追至栗浦, 見其夫已在舡上矣. 妻呼之切懇, 堤上但搖手而不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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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初堤上之發去也, 夫人聞之追不及, 及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 因名其沙, 曰長沙. 親戚二人, 扶腋將還, 夫人舒脚, 坐不起, 名其地, 曰伐知旨. 久後夫人不勝其慕, 率三娘子上鵄述嶺, 望倭國痛哭而終. 仍爲鵄述神母, 今祠堂存焉.
 
: 처음 제상이 떠날 때, 부인이 이를 듣고 좇았으나 미치지 못했으니, [[망덕사]] 문 남쪽 모래사장에 이르러, 누워서는 크게 부르짖었다. 이로 인하여 그 모래사장의 이름을, 장사(長沙)라 이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친척이 부축하며 돌아오는데, 부인이 다리가 풀려 앉은 채로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땅의 이름을 벌지지(伐知旨)라 이르게 되었다. 오랜 후에 부인이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에 올라, 왜국(倭國)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 생을 마쳤다. 그로 인하여 치술령의 신모(神母)가 되었으니, 지금도 사당이 존재한다.
 
[[치술령]]은치술령은 [[울산광역시|울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상에 있는 바위는 지아비를 그리워하던 바위라고 하여 망부석이라고 부른다. 문헌의 마지막에서 언급된 사당은 인근에 위치한 [[은을암]](隱乙岩)으로, 죽은 아내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든 곳이라 하여 유래되었다. 망부석과 은을암은 함께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 『[[박제상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참고|박제상망부석설화|설명=[[후백제]] 박제상의 관련 [[전설]]이나 [[설화]]에 대해서는}}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