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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오나라는 [[황룡 (오)|황룡]](黃龍)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 [[천기]](天紀) 4년([[280년]]) [[진 (위진남북조)|진]]에 항복하기까지 4대 52년에 걸친 왕조다왕조이다. 오나라의 손권은 위의 [[조조]](曹操) · 촉한의 [[유비]](劉備)와 비교하면 이미 [[손견]]과 [[손책]]이 쌓아올린 기반이 있어 처음부터 혜택받은 인물이었다. 오나라의 시조가 되는 손견은 일찍이 이 지방에서 이름을 떨친 춘추 시대의 병법가 [[손무]](孫武)의 후손이라고도 하며, 17살 때 [[해적]]을 퇴치해 일약 유명한 인물이 된다. 그리고 중앙 정부에서 관리가 되어 각지의 반란 진압을 맡고, 명망 높은 [[원술]](袁術)의 후원 아래에서 [[반동탁 연합군]]에도 가세하지만 [[초평]](初平) 3년([[192년]]) 형주자사(荊州刺史) [[유표 (후한)|유표]](劉表)를 공격하던 중에 허무하게 죽고 만다. 당시 손견은 일개 태수에 불과해 손견이 죽은 다음에는 영지와 병사 모두 원술에게 흡수되었다. 그렇지만 전장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움으로써 세상에 손씨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황개]](黃蓋) · [[정보 (후한)|정보]](程普) · [[주치 (동오)|주치]](朱治) 등과 같은 신하는 계속해서 맏아들 손책을 받들었다.
 
손책은 실질적인 오나라의 창업자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처음에는 원술 밑에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이후 강동에 기반을 쌓고 독립해, 친구 [[주유]](周瑜)와 협력해 세력을 확대해 갔다. 손책은 성격이 활발하고 기꺼이 남의 의견을 잘 받아들였으므로 그 당시 [[장소 (동오)|장소]](張昭) · [[장굉]](張紘) · [[태사자]](太史慈) · [[여몽]](呂蒙) · [[주태 (동오)|주태]](周泰) · [[장흠]](蔣欽) 등과 같은 문무 관리가 수하에 들어왔다. 그러나 [[건안]](建安) 5년([[200년]]), 손책은 자신이 죽인 오군태수(吳郡太守) [[허공 (후한)|허공]](許貢)의 밑에 있던 식객의 손에 의해 26살의 젊은 나이로 죽고 만다(다른 이야기로는, 신료들이 자신보다 도사 [[우길]]을 더 존경한다는 이유로 우길을 처형하였는데, 우길의 원혼에 시달리다가 병사했다고도 한다). 손책은 임종을 맞을 때 동생 손권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군세를 이끌고 싸우는 것이라면 내가 더 낫다. 그러나 현자를 발탁하여 나라를 지켜내는 일은 네가 더 낫다”라고 유언한다. 그리고 내정에는 장소, 군사에는 주유를 각각 보좌역으로 선정해 손책의 유언대로 오나라가 운영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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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손량의 치세에 정권을 장악한 [[제갈각]](諸葛恪)은 처음에는 선정을 펼쳐 널리 민심을 얻고, 동흥 전투에서 승전하여 그 명망이 한때 드높았다. 그러나 그로 인해 교만해져 20만 대군을 무리하게 징발하여 합비신성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여 민심을 잃었고, 돌아와서는 자기 실패를 가리는 데 급급하고 다시 출정하려 하여 동료들을 두렵게 했다. 마침내 [[손준]](孫峻)이 손량과 공모하여 제갈각을 죽이고, 손준은 실권을 쥐고 제갈각을 능가하는 만행을 벌여 오나라는 더욱 어지러워졌다. 손준이 죽자 그 권세는 손준의 종제 [[손침]](孫綝)에게 넘어갔으나 손침의 정치는 손준과 다를 것이 없었으며, 더욱이 [[제갈탄]](諸葛誕)의 난을 효과적으로 돕기는커녕 오히려 패퇴를 거듭하고 마침내 제갈탄을 지켜내지 못했으므로 원성이 자자했다. [[영안 (오)|영안]](永安) 원년([[258년]]), 손량은 실권을 장악한 손침을 주살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손침은 손량을 내쫓고 폐제의 형이며 손권의 여섯째 아들인 [[손휴]](孫休)를 황제로 옹립하니 곧 오 경제(景帝)다. 경제는 손침과 대립하던 끝에, [[장포 (동오)|장포]](張布) · [[정봉 (형)|정봉]](丁奉)과 모의해 그를 체포해 처형한다.
 
경제는 즉위 초기에는 조세를 감면하고, 과거 제도와 유사한 관리 등용 제도를 실시하는 등 오나라를 개혁해 보고자 하였으나 말년에는 측근 장포와 [[복양흥]](濮陽興)에게 정무를 위임했으며, 장포와 복양흥 역시 비교적 악정을 펼쳤으므로 원망이 높았다. [[원흥 (오)|원흥]](元興) 원년([[264년]]), 경제가 죽고 때마침 촉한의 멸망과도 겹쳤기 때문에 이 기회에 훌륭한 황제를 세워 거국일치로 오나라를 융성시키려 했다. 이때 지목된 사람이 바로 앞서 태자에서 폐위된 손화의 아들 손호이다. 그런데 황제가 된 손호는 성질이 포악하고 오만방자해 대사면을 연발하는 한편, 손휴의 아들 [[손완]](孫[[파일:사람 이름 완.png]]𩅦), · [[손굉]](孫[[파일:사람 이름 굉.png]]𩃙), · [[손망]](壾), · [[손보 (오)|손보]](孫[[파일:사람 이름 보.png]]𠅨)를 잡아들여, 손완과완과 손굉을굉을 죽였다. 더구나 연회 자리에서 신하들을 취하게 만들어 허튼 언동을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죽이고, 안면을 벗겨내거나 눈을 도려내는 잔인한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했다. 또 간신 하정 · [[잠혼]](岑昏)을 총애하고, 백성들을 가혹한 노역으로 내몰았기 때문에 민심은 급속도로 나빠져갔다. 280년 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자 손호는 어이없이 그대로 항복하여, 중국대륙은 통일되어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 역대 황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