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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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 박정희는 "[[여운형]]의 [[건국동맹]] 만주분맹과 연계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주장이 있다.<ref name=autogenerated13>[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352260&ctg=1000&cloc=home|showcase|main 2010년 <월간중앙> 7월호, -누구나 박정희를 알지만 누구도 박정희를 모른다.- 내용 발췌.]</ref>
 
===== 만주군 복무 (1944 ~ 1945) =====
없어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독립투사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투사 토벌에도 참여한 셈이라는 주장도 있다. 언론인 겸 작가 [[문명자]]는 [[1972년]] [[일본]] [[도쿄]]에서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동창생 두 명으로부터 <ref name="kang125">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125페이지</ref><ref name="moon66">문명자,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 (월간 말, 1999) 66-67페이지</ref> 만주군관학교 동창생들이 박정희에 대해 "박정희는 하루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 마디 없는 과묵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에 나간다 하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 하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돈 놈 아닌가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라고 증언하는 것을 들었다고 주장하였으나<ref name="kang125"/><ref name="moon66"/> 2004년 동아일보가 제안한 가상토론에서 언론인 [[조갑제]]는 박정희가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나 이는 중국군이므로 독립군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였다.
 
조갑제가 팔로군과 독립군이 무관하다고 한 반면, [[진중권]]은 팔로군에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ref name="가상토론">[http://www.donga.com/fbin/output?f=todaynews&code=a__&n=200408040164&main=1 "가상토론 박정희 조갑제 진중권 만나다" 동아일보 2006년 12월 6일자] </ref>
<!-- 출처 "가상토론"에 해당 내용 없음
진중권은 “박정희가 육사를 졸업하고 만주국 보병 제8연대의 소대장으로 임명되어 목단강 아래 있는 영안으로 파견된 곳은 일찍이 노령 신한촌에 웅거하던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서진할 때의 요충으로서 한인 농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고 하였으나
-->
정설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의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공작인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최소 500여명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중국공산당]]에 의해 숙청되거나 학살당하였고 만주 지역 내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한 [[중국공산당]]이 이를 방관함으로써 민생단 사건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조선인의 영향력은 위축되었고 조선인과 중국 공산당 간의 연대도 약화되었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865542</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150437& [기고&#93; 인구·경제력·자치권 동시 위축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2/03/p021075000200203060399036.html 인쇄하기 : 한겨레21<!-- 봇이 따온 제목 -->]</ref>
<!-- 직접적 관련이 없음.
이진영 [[경희대학교]] 교수는 [[2000년]], 자신의 논문인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민생단 사건으로 인해 1940년대에 들어서는 사실상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은 종언을 고하였다고 주장하였다.<ref>이진영,‘학술지 논문’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정책의 기원에 대하여》- (2) 민생단 사건과 족성((</ref>
-->
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에도 [[1940년]] 이후 한국의 독립군 대부분이 [[광복군]]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근거지를 중국 내륙에 위치한 [[충칭]](重慶)으로 옮겼다고 서술되어 있다.<ref>국민공통 교육과정‘국사’교과서 P.121</ref>
한편 박정희와 같이 만주 제8사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오마이뉴스]]의 취재에서 “당시 제8단 지역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팔로군]] 토벌을 위해 주둔하고 있었으나 박정희는 복무 당시 팔로군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았다”고 증언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0049417&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파일:Park Army ID.jpg|thumb|박정희 임시 육군 군인(군속) 계]]
 
군관시절 박정희는 스스로 타카기 마사오({{llang|ja|高木正雄 たかぎ まさお}})로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기|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ref name="오마이">[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086360 대통령과 '창씨개명'], 《오마이뉴스》, 2002.9.2.</ref>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가 [[1945년]] [[3월]] 박정희의 병적사항을 알리기 위해 일제 치하의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면사무소에 제출한 병적기록부를 바탕으로 작성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高木正雄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 형 박동희 또한 高木東熙(たかぎ とおひろ)로 표기되어 있다.<ref name="오마이"/>
 
한편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llang|ja|岡本實}})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창씨개명을 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재미 언론가 문명자는 1999년 그의 저서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에 “만주군관학교 시절 박정희의 창씨명은 다카기 마사오. 그 곳을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했을 때 박정희는 창씨명을 완전히 일본사람 이름처럼 보이는 오카모토 미노루로 바꾼다.”라고 서술하였다.<ref name="세계일보">[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60809000886&subctg1=&subctg2=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은 왜 두개였나], 《세계일보》, 2006.08.09</ref> 2005년 [[도쿄대학교]]에서 출판한 《일본 육해군 총합사전》 2판에는 박정희가 '오카모토 미노루'로 소개되었다.<ref name="세계일보"/> 조희연 교수도 자신의 저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김병태 [[건국대학교]] 명예교수는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관동군 23사단 72연대에 배속됐는데 거기 연대장의 이름이 오카모토였다”고 설명하였다. <ref>[http://db.history.go.kr/front/dirservice/JW/viewSearchResultJW.jsp?&pSearchType=4&pSearchWord=&pSysLevel=3&pQuery=002800420049003A00285CA1672C5BEC00290029&pPageLine=10&pSearchName=5CA1672C5BEC&pSetID=105729&pOrderByType=&pTotalCount=19&pCurrentPage=1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ref>《[[오마이뉴스]]》와 《[[한겨레]]》는 이에 대해 “자료로 입증된 사실이 없거나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으며 타카기 마사오로 한 차례 개명한 사실만 확인되었으며 자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라고 밝혔다.<ref name="오마이"/><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0413 ‘박정희 재조명’ 날선공방 불붙는다] 한겨레, 2004-07-26</ref>
 
===== 일제 강점기 후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