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99번째 줄:
[[1957년]] [[대한웅변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당시 [[한영고등학교]]에 재학중이던 [[김상현 (1935년)|김상현]]을 만나 이후엔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한다.<ref>김대중, 《경천애인》 (맑은물, 2002) 51페이지</ref>
 
[[1958년]] [[대한민국 제4대 총선|4대 국회의원 선거]] 민주당 후보로 강원도 [[인제군|인제]]에 출마하려 했으나 자유당 [[나상근]] 후보가 중복추천을 통해 등록무효를 시켜 출마조차 하지 못한다. 그 뒤 나상근 당선인이 당선무효 판정을 받아 [[1959년]] 재보선에 다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자유당 [[전형산]] 후보가 제기한 색깔론에 의해 낙선한다. 설상가상으로 [[1959년]]8월28일에는에는 부인 차용애가 음독자살하는병으로 사망하는 등<ref>[http://news.donga.com/3/all/20101118/32678104/1 공정성-정확성 결여 논란 ‘한국어판 위키피디아’… 전직 대통령-북한 관련 내용 분석해보니…] 동아일보 2010.11.18</ref> 힘겨운 정치 초년기를 보낸다. 같은해 7월엔 민주당 강원도지구당 부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1월에는 민주당 강원도 인제군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 민주당 기획위원 겸 대변인이 되었다. [[이철승]]이 [[조병옥]]과 장면으로 양분된 민주당에서 장면을 찾아 신파의 소장 실력자로 데뷔하자 김대중도 장면을 찾아 민주당 신파로 정치적 인연을 쌓는다.<ref name="손세일"/> 같은해 4월 6일엔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여하였다. 선거부정 규탄 시위는 가두시위로 발전했고 김대중도 [[서울특별시청|서울시청]]까지 야당 및 학생 시위대와 동행하였다. 같은 해 7월에 치러진 [[대한민국 제5대 총선|5대 국회의원 선거]]에 인제군 후보로 출마했으나 또다시 낙선하고야 만다.
1,039번째 줄:
 
== 주석 ==
{{reflist|30em}}
 
== 참고 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