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다마소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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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소 1세는 교황으로 착좌하면서 [[이교 (기독교)|이교]]의 조짐에 맞서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368년과 369년 두 차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한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마케도니우스주의]]를 단죄하고, 381년 [[이단]]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다마소 1세는 비밀리에 [[예로니모]]를 자신의 비서로 임명하였다. 409년 예로니모는 “여러 해 동안 나는 로마의 주교 다마소를 도와 동·서 교회회의에서 그에게 문의된 질문들에 대한 그의 답변을 적는 것과 같은 서신 작성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ref>[http://www.ccel.org/fathers/NPNF2-06/letters/lette123.htm ''Epistle'' cxx.10]</ref>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것은 다마소 1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던(380년) 중이었다. 그리고 다마소 1세의 교회 개혁에 따라 라틴어가 기독교의 중심적 전례 언어가 되었다. 그리하여 다마소 1세는 예로니모에게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70인역 성경]]을 대본 삼아 옛 상고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다 정확하고 대중이 널리 사용하는 대중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장려하였다. 그 결과 [[불가타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이 성경은 382년 로마 교회회의를 통해 인준을 받았다.
 
다마소 1세는 18년 2개월 동안 교황으로 재위하였다. 훗날 그는 [[성인 (종교)|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기념일은 12월 11일로 지정되었다. 다마소 1세는 사후 자신의 묘비에 새겨질 비문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바다 위를 걸으면서 심한 풍랑도 진정시킬 수 있는 분, 지상의 죽어가는 씨앗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 죽음의 끔찍한 쇠사슬을 푸실 수 있고 3일간의 암흑 이후에 마르타를 위하여 그의 오빠를 이 세상에 다시 불러오실 수 있는 분, 다마소가 먼지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드실 분, 그분을 나는 믿는다.”
 
==그라티아누스 황제==
==동방 교회와의 관계==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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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다마소 1세는 문제의 그 규정을 도외시하고 로마 주교좌의 우위성은 의심 없이 [[페트루스|성 베드로]]의 계승에 명확하게 근거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마소 1세는 [[로마 교황청]]의 문서고와 상서원 확대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전례 개혁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라틴어가 이 때부터 [[로마 가톨릭]]에서 전례의 주용어가 되었다. [[히에로니무스|성 예로니모]]가 377년 다마소 1세의 비서가 되어 [[그리스어]]로 된 [[성서]]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382년 로마 공의회의 인준을 받았다. 다마소 1세는 건축 외에도 순교자들의 공경에도 열성적이어서 [[카타콤베]]의 순교자들의 묘소를 복구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