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다마소 1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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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avarozzi San Jerónimo y dos ángeles 1617. Óleo sobre lienzo. 116 x 173 cm. Galería Palatina. Palazzo Pitti.jpg|thumb|upright|《성 예로니모와 천사들》. [[바르톨로메오 카바로치]]의 그림.]]
 
다마소 1세는 교황으로 착좌하면서 [[이교 (기독교)|이교]]의 조짐에 맞서 가톨릭교회를 수호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368년과 369년 두 차례 로마에서 시노드를 소집한 그는 [[아폴리나리우스주의]]와 [[마케도니우스주의]]를 단죄하고, 381년 [[이단]] 문제를 다루기 위해 소집된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이 공의회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리우스주의]]가 단죄되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선서문이 공적으로 채택되었다.
 
다마소 1세는 비밀리에 [[예로니모]]를 자신의 비서로 임명하였다. 409년 예로니모는 “여러 해 동안 나는 로마의 주교 다마소를 도와 동·서 교회회의에서 그에게 문의된 질문들에 대한 그의 답변을 적는 것과 같은 서신 작성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ref>[http://www.ccel.org/fathers/NPNF2-06/letters/lette123.htm ''Epistle'' cxx.10]</ref>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된 것은 다마소 1세가 교황으로 재임하던(380년) 중이었다. 그리고 다마소 1세의 교회 개혁에 따라 라틴어가 기독교의 중심적 전례 언어가 되었다. 또한, 당시에는 [[성경]]이 여러 역자에 의해서 번역되어 통일성이 없이 난잡하고 정리가 안 되어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통일성 있는 새로운 공용 성경 본문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다마소 1세는 예로니모에게 그리스어 [[신약성경]]과 [[70인역]] 등을 번역 대본으로 삼아 옛 상고 라틴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다 정확하고 당시 대중이 널리 사용하는 대중 라틴어로 번역하도록 장려하였다. 그 결과 [[불가타 성경]]이 나오게 되었다. 이 성경은 382년 로마 교회회의를 통해 공식적인 라틴어 성경으로 인준을 받았다. 다마소 1세의 사후, 예로니모는 저서 《위인전(De Viris Illustribus)》에서 다마소 1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짧은 글을 썼다. “시를 쓰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던 그는 아름다운 운율을 지닌 많은 시를 썼다. 그는 80세에 가까운 나이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의 치세 때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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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정교회|동방교회]]와는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삼위일체]]에 관한 용어를 놓고 카에사리아의 바실리오스와 약간의 갈등이 있었다. 삼위일체와 그리스도론의 논쟁은 계속되었다. 안치라의 마르첼로가 제기한 이단적 삼위일체 논쟁은 374년 그의 죽음으로 끝났고 라오디케아의 아폴리나리스의 이단적 그리스도론은 [[375년]] 공적으로 단죄되었다.
 
이 공의회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리우스주의가 단죄되고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 선서문이 공적으로 채택되었다. 다마소 1세는 공의회의 세 번째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치적 원리에 기초를 두고 새 로마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에 로마 다음 가는 영예와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382년]] 로마 공의회에서 다마소 1세는 문제의 그 규정을 도외시하고 로마 주교좌의 우위성은 의심 없이 [[페트루스|성 베드로]]의 계승에 명확하게 근거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
 
다마소 1세는 건축 외에도 순교자들의 공경에도 열성적이어서 [[카타콤베]]의 순교자들의 묘소를 복구하고 아름답게 장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