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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6월 4일 [[조선]] [[함경남도]] [[갑산군]] 이 비적에 습격된 사건후([[보천보 전투]]), [[만주국]] 의 조선인 치안관계자가 조사를 한 결과, 「습격 사건의 주모자 [[김일성]](金日成)은, 본명은 김성주(金成柱) 이며, [[관동군]] 의 통역으로서 일하고 있는 김영주의 친형이다」라는 증언을 얻고, 김영주에 협력을 요구하고, 김일성의 조모의 리보익 과 김영주이, 김일성에게 [[일본제국 육군]] 에 투항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는 고향인 만경대에서 농사일을 계속하다가 [[1955년]] [[양력]] [[9월 2일]] 남편 [[김보현 (1871년)|김보현]]의 임종을 보고, [[1959년]] [[10월 18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사의 묘가 있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에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변절자들이 리보익 할머니에게 “…일본제국은 김일성 장군이 산에서 내려오면 일본 관동군 대장을 시키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은 이번에 나라의 이런 훈령을 받고 할머님을 백두산에 모시고 가서 산에서 고생하는 김일성 장군을 데려오려고 합니다. …”라고 간교한 술책을 꾸미자, 할머니는 이들에게 “사람이 한번 죽으면 그만이지 3년 전에 신문에 죽었다는 광고까지 났다는 손자가 살았다니 웬 말인가! 우리 손자를 관동군대장이 아니라 그 할애비를 시킨다 해도 나는 안 가겠다. 내 아들 [[김형직]]이 왜놈에게 죽은 것만해도 가슴이 아프다. 나는 손자 데리러 못 가겠다.”라고 호령하면서 당장 물러가라고 소리쳤다.<ref name=autogenerated1 /> 그러자 [[일본 제국|일제]]는 할머니를 강제적인 방법으로 중강진과 포평 등 압록강 연안과 중국동북 일대의 험한 산속까지 데리고 다니면서 끈질기게 설득하고 때로는 박해하였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ref name=autogenerated1 />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고 손자 [[김일성]] 내외가 1945년 [[10월 14일]] 저녁 [[만경대]] 고향집을 찾았을 때 두 팔로 손자를 끌어안고 “… 기어이 돌아왔구나! 이게 꿈이냐 생시냐!”라고 하면서 눈물을 닦고 “너를 보니 한 생에 쌓인 시름이 다 풀리는구나! …그런데 아버지, 어머니는 어데다 두고 이렇게 혼자 왔느냐. …같이 오면 못 쓴다더냐! …”하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자제분들을 생각하며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ref name=autogenerated1 /> 그는 해방의 기쁨을 안고 고향 만경대에서 농사일을 계속하다가 [[1955년]] [[양력]] [[9월 2일]] 남편 [[김보현 (1871년)|김보현]]의 임종을 보고, [[1959년]] [[10월 18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사의 묘가 있는 [[평양시]] [[만경대구역]] 만경대에 반신상이 세워져 있다.<ref name=autogenerated1 />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