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5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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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표}}
'''제5공화국'''(第五共和國)은 [[1979년]] [[12·12 군사 반란|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 이후 헌법 개정을 통해 탄생한 대한민국의 다섯 번째 공화국이다. 1981년부터 1988년까지 존속했다.
[[10·26 사건]]으로 새로 등장한 이른바 [[하나회|신군부]] 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병력을 동원하여 군권을 차지했고
제5공화국은 제4공화국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 주력했다. 제5공화국은 영구집권이 가능한 기존의 6년 연임제 대신 7년 단임제를 고수했으며, 통금 해제 및 교복 자율화 등의 유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제5공화국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군사독재 정권이었다. 형식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랐으나 실질적으로는 반대파를 향한 인권 유린, 야권 탄압 등의 독재 정치를 펼쳤다. 결국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민중봉기가 터졌고, 정부가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게 됐다. 이후 차기 대통령 노태우의 취임과 함께 제5공화국은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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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헌법에 따라 국무총리 [[최규하]]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였으나 곧 [[전두환]], [[노태우]]를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이 [[12·12 군사 반란|12·12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했다. 1980년 3월 보안사에서는 정보처를 부활하고, 민주화 여론을 잠재우고 군부가 정치에 나서는 것을 정당화 하는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K-공작 계획|K공작계획]]을 실시했다. 1980년 4월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되어 국내의 모든 정보 기관을 장악했다.
1980년 5월 신군부 세력은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5
12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박정희]] 정권을 전면 부정했다. 박정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그는 헌법 개정 과정에서 "5
5공 정권은 형식상으로는 민주주의를 따랐다. 일단 대통령의 임기를 6년에서 7년으로 늘린 대신 영구집권이 가능한 연임제 대신 중임 제한을 기본으로 하는 단임제를 택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 중에 법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과 국회의원을 임명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을 삭제했으며, 국회의 권력을 대폭 강화하였다. 유신체제 당시에는 야당인사의 대선 출마가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으나(명목상으로는 허용했으나 정부기관이 이를 방해했기 때문에 금지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5공화국은 야권의 출마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확고한 계승을 담보하기 위해, 기존의 통일주체국민회의를 변형시켜 새로운 선거인단을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제5공화국은 유신체제처럼 간선제를 고수했다.
그럼에도 국가의 사회복지 의무에 대한 규정을 설치하고(헌법 제32조), 경제 질서에 대한 공법적 규제를 확대했다. 기본권에 대해서도 대체적으로 제3공화국의 조항 수준으로 회귀했고, 행복추구권(헌법 제9조)이나 연좌제의 금지(헌법 제12조 3항), 사생활의 보호(헌법 제16조), 환경권(헌법 제33조) 등의 조항도 신설됐다. 헌법 개정에는 [[국민 투표|국민투표]]를 통한 개정만 가능하도록 규정해 절차를 일원화시켰다(헌법 제131조).
제5공화국은 [[김영삼]], [[김대중]] 등을 비롯한 주요 야당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금지한 채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1981년)|한국국민당]] 등의 이른바 관제야당을 내세워 정당정치를 형식화하는 등 사실상의 1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중정은 야당 참여자를 미리 선별했을 뿐 아니라, 일부 운영비를 보조하고 전국구 후보들의 당비 헌금 한도액(1억원)까지 친절하게 정해줬다. 정치규제자의 친인척, 친 김대중 인사, 해직 언론인 등은 공천에서 제외하도록 엄격히 관리하기도 했다.<ref>[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5/02/005000000200502241719109.html 총재까지 지정해 “야당 만드시오”]2005.02.24</ref> 대선 때는 야권의 입후보를 허용하면서도, 정부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5공화국은 임기 내내 정권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5·17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유혈 진압 등 정통성 없는 정권 창출 과정에 대해 재야인사들의 비판을 받았다. [[1983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를 맞이하여 [[전두환]] 정권의 야당인사 탄압에 저항하는 의미에서 [[김영삼]]은 23일간 단식투쟁을 시도했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753a 김영삼 - Daum 백과사전<!-- 봇이 따온 제목 -->]</ref>
=== 유화 조치 ===
이러한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제5공화국은 사회정책면에서 규제해제를 지향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야간 통행금지|야간통행금지]]의 해제와 중고등학교 교복 자율화, [[한국프로야구|프로야구]], [[축구|프로축구]], [[민속씨름위원회 전국장사씨름대회|프로씨름]] 등의 스포츠산업의 활성화 등이 대표적이었다. [[컬러 텔레비전]]의 보급과 컬러TV방송도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경제적으로는
=== 야당의 돌풍 ===
80년대
당시 [[대한민국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의 분석 결과, 신한민주당은 최대한 좋은 여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12 ~ 13석을 얻는데 그치고 특히 종로
창당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된 신생 정당 신한민주당이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는 돌풍을 일으키며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고, 특히 종로
=== 야권의 분열 ===
[[1986년]] 12월, 신한민주당 총재 [[이민우 (1915년)|이민우]]는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먼저 단행할 경우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했다. 이에 대해
=== 몰락 ===
[[1987년]] 1월 [[박종철|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학생 시위에 참가했던 [[이한열]]이 [[최루제|최루탄]]에 맞아 숨지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에 의해 일어난 [[6월 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은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됐다.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4월 13일, 정부는 ‘5공 헌법에 의한 대권이양’을 골자로 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하였다. 그러자 야권·재야가 재결합하고 학계·종교계 등에서도 이에 반대하는 시국선언·농성이 잇달았다. 이후 5월 27일 각계를 망라한 각종 단체가 총결집된 ‘민주화추진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어 ‘군사통치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을 슬로건으로 대정권투쟁에 돌입했다. 국민운동본부는 ‘6·10 민주화 장정대회’를 개최, 6월 항쟁의 대막이 올랐다.
1987년 6월 10일, 노태우는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다. 이를 불법집회로 규정한 정부는 무한정한 공권력을 투입하여 원천봉쇄를 시도했으나 서울·부산·광주·인천 등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시민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겸 총재 [[노태우]]를 내세워 [[6·29 선언|시국수습방안]]을 발표하게 하고, 이를 통해 제5공화국 헌법이 개정된다. 그 결과 1971년 이후 16년만에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 형태의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지만, 민주화 세력의 분열, 부정 선거 논란 속에서 5공 주역이었던 [[노태우]]가 제13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8년]] [[2월 25일]] 노태우는 제6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제5공화국은 종식됐으나 사실상 1993년까지 연장되었다.
== 경제 ==
1980년대 전반기에는 1960·
1986년 [[현대자동차]] [[현대 포니|포니
10대 대기업이 국민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79년의 33%에서 1989년에는 54%로 증가하고, 30대 대기업의 계열기업은 1970년 126개, 1979년 429개, 1989년 513개로 늘어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촌인구는 급속히 감소하고, 이농민의 대다수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여 막노동에 종사하거나 산업노동자 혹은 서비스업으로 전환하였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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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
{{참조|대한민국의 대외 관계#제5공화국}}
반공의 기치 아래 한·미·일 삼각동맹을 추진했다.<ref name="30년">[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ref>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미국의 개입 또는 방조 의혹은 이 시기 학생운동의 한 테마였다. 일본과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재일한국인 지문날인제도, 일본의 대북 접근 등 주로 일본이 야기시킨 각종의 현안 때문에 갈등을 빚었다. 한국은 북한에 대해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과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일으켰다. 서유럽과는 정치적 이슈가 크지 않았고, 경제·통상 부문에 집중하였다.
=== 대북 관계 ===
{{참조|남북 관계#제5공화국}}
전두환은 북한에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제시했다. 전두환은 집권 초기 정권 안정을 위해 1982년 북한과 ‘잠정협정’을 맺고 비정치적, 비군사적 교류부터 점진적으로 하자는 ‘민족화합 민주통일방안’을 제의했다. 역대 정권으로선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3435052 [뉴시스아이즈]이슈진단 '가열되는 통일비용 논란'-역대 정부 통일방안 살펴보니…정국따라 천차만별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1983년 10월 9일 오전 10시 23분, 버마의 수도 랑군 중심지의 아웅산 묘소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 등 장관급 5명이 목숨을 잃고 여기에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심상우 민정당 총재비서실장,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등 민·관의 희생자가 21명, 부상자가 46명에 달하는 대참사가 빚어졌다. 이후 군 내부에서 북한에 무력으로 보복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무력 보복 계획을 승인하지 않았다. 그리고 10월 13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희생자 장례식을 치르고, 20일에는 대통령 특별담화에서 “이것이 우리의 평화 의지와 동족애가 인내할 수 있는 최후의 인내이며, 다시 도발이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응징할 것이다”라고 발표했다. 사실상 무력 보복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대내외에 밝힌 것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6&aid=0000022293 아웅산 테러가 ‘성공’했다면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일부 보수 세력은 [[1983년]]의
1984년 9월 초 남쪽에 발생한 홍수로 전국에서 190여명이 생명을 잃고 재산피해도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은 북한에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북한 역시 같은해 9월 [[허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허담]] 비밀특사를 서울에 특파해 전두환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논의를 타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2151401 [뉴스테이션/딥포커스] 북한의 ‘도발과 대화’ 이중전술의 비밀<2>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전두환은 허담 밀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일성의 말을 전해듣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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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김일성 주석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경청해보니 내용 하나 하나가 내 생각과 거의 동일합니다. 김 주석께서는 공개적으로 말씀이 계셨지만 40년 전에는 민족해방 투쟁으로, 그리고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서 애써오신 충정이 넘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남북한 최고책임자들의 회담이 이와 같은 분위기라고 할 것 같으면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는 것도 나의 의견입니다.<ref>[http://www.tongilnews.com/pds/pdsView.html?pdsNo=3961&pdsType=5&page=1&startYear=1985 통일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1987년]] [[11월 29일]]에는 북한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가 [[대한항공 858편
=== 한미 관계 ===
{{참조|한미 관계#제5공화국}}
제5공화국은 전 정권에 이어 친미(親美) 일변도의 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에 있어서 미국은 혈맹관계라고 지칭될 만큼 전통적인 우방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학생들의 [[반미주의]] 운동을 조장한 측면도 있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었다. 당시 평시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에 있어서 미국의 승인 없이는 군대의 자유로운 이동이 불가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를 알고서도 묵인한 미국에 대한 반감이 형성되었고, 이는 1982년 3월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을 시작으로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등을 통해 학생·재야에서는 반미운동이 가속되었고 정부간에는 통상마찰이 심화되어 급기야 국민적 갈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미국 정부는 1988년 열린 광주청문회에서 성명서를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동원한 특전사 부대나 20사단 부대는 광주에 투입될 당시나 광주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는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하에 있지 않았으며, 그 기간 동안 광주에 투입되었던 한국군의 어느 부대도 미국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했다.<ref name= '미국정부 성명서'>1980년 5월 대한민국 光州서 일어난 사건에 관한 미국정부 성명서</ref>
이 시기의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레이건]] 정부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계엄령 발동에 대해서 견제하는 태도를 유지해왔다.<ref name="30년"/> 양국간의 위상조명과 관계 재정립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바, 이는 한국현대사를 돌아보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즉 군사적으로 한국이 미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지금까지의 정치적·경제적 대미 의존성이나 불평등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은 더 이상 한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ref>《[[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정치/한국의 정치/한국의 외교/한국과 미국의 관계#1980년대의 한미관계|1980년대의 한미관계]]〉</ref> [[미국]]의 압력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개발한 핵을 폐기하였다는 견해가 있으나 확인된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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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럽과의 관계 ===
한국은 친미·친서방 외교기조를 유지해 오면서도
=== 기타 대외 관계 ===
[[아프리카]] 대륙 각국 순방, [[아시아]] 6개국 순방 등을 다녔다. 1983년 아시아 6개국 순방 중 [[미얀마|버마]](미얀마)의 랭군에 위치한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 사건을 당하여 순방 일정을 취소하고 되돌아오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1980년), [[레바논]](1981년), [[파키스탄]](1983년), [[브루나이]](1984년), [[부탄]](1987년)과 수교하였다.
== 내각 구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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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10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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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wspan=6 align="center" | 부총리 겸<br/>경제기획원 장관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신병현]](申秉鉉)
| align="center" | [[1980년]] [[9월 2일]] ~ [[1982년]] [[1월 4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김준성 (정치인)|김준성]](金埈成)
| align="center" | [[1982년]] [[1월 4일]] ~ [[1983년]] [[7월 7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서석준]](徐錫俊)<ref name="순국">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순국.</ref>
| align="center" | [[1983년]] [[7월 7일]] ~ [[1983년]] [[10월 7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신병현]](申秉鉉)
| align="center" | [[1983년]] [[10월 15일]] ~ [[1986년]] [[1월 8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김만제]](金滿堤)
| align="center" | [[1986년]] [[1월 8일]] ~ [[1987년]] [[5월 26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정인용]](鄭寅用)
| align="center" | [[1987년]] [[5월 26일]] ~ [[1988년]] [[2월 24일]]
|}
; 국토통일원 장관
{| class="wikitable" style="font-size:10pt"
|-
! width="100" align="center" | 명칭
! width="060" align="center" | 대수
! width="150" align="center" | 이름
! width="240" align="center" | 임기
|-
| rowspan=5 align="center" | 국토통일원 장관
| align="center" | 9대
| align="center" | [[이범석 (1925년)|이범석]](李範錫)
| align="center" | [[1980년]] [[9월 2일]] ~ [[1982년]] [[1월 3일]]
|-
| align="center" | 10대
| align="center" | [[손재식]](孫在植)
| align="center" | [[1982년]] [[1월 4일]] ~ [[1985년]] [[2월 18일]]
|-
| align="center" | 11대
| align="center" | [[이세기]](李世基)
| align="center" | [[1985년]] [[2월 19일]] ~ [[1985년]] [[7월 31일]]
|-
| align="center" | 12대
| align="center" | [[박동진 (1922년)|박동진]](朴東鎭)
| align="center" | [[1985년]] [[8월 1일]] ~ [[1986년]] [[8월 26일]]
|-
| align="center" | 13대
| align="center" | [[허문도]](許文道)
| align="center" | [[1986년]] [[8월 27일]] ~ [[1988년]] [[2월 24일]]
|}
줄 239 ⟶ 262:
| align="center" | 41대
| align="center" | [[노태우]](盧泰愚)
| align="center" | [[1982년]] [[4월 28일]] ~ [[1983년]] [[7월 6일]]
|-
| align="center" | 42대
| align="center" | [[주영복]](周永福)
| align="center" | [[1983년]] [[7월 6일]] ~ [[1985년]] [[2월 18일]]
|-
| align="center" | 43대
| align="center" | [[정석모]](鄭石謨)
| align="center" | [[1985년]] [[2월 18일]] ~ [[1986년]] [[8월 26일]]
|-
| align="center" | 44대
| align="center" | [[김종호 (1935년)|김종호]](金宗鎬)
| align="center" | [[1986년]] [[8월 26일]] ~ [[1987년]] [[1월 21일]]
|-
| align="center" | 45대
| align="center" | [[정호용]](鄭鎬溶)
| align="center" | [[1987년]] [[1월 21일]] ~ [[1987년]] [[5월 26일]]
|-
| align="center" | 46대
| align="center" | [[고건]](高建)
| align="center" | [[1987년]] [[5월 26일]] ~ [[1987년]] [[7월 14일]]
|-
| align="center" | 47대
| align="center" | [[정관용 (1935년)|정관용]](鄭寬溶)
| align="center" | [[1987년]] [[7월 14일]] ~ [[1987년]] [[9월 14일]]
|-
| align="center" | 48대
| align="center" | [[이상희 (1932년)|이상희]](李相熙)
| align="center" | [[1987년]] [[9월 14일]] ~ [[1988년]] [[2월 24일]]
|}
줄 335 ⟶ 358:
| align="center" | [[1985년]] [[7월 16일]] ~ [[1987년]] [[5월 25일]]
|-
| align="center" | 36대
| align="center" | [[정해창]](丁海昌)
| align="center" | [[1987년]] [[5월 26일]] ~ [[1988년]] [[
|}
줄 447 ⟶ 470:
| align="center" | [[1982년]] [[5월 21일]] ~ [[1985년]] [[2월 15일]]
|-
| rowspan=2 align="center" | 37대
| rowspan=2 align="center" | [[황인성]](黃寅性)
| align="center" | [[1985년]] [[2월 19일]] ~ [[
|-
| rowspan=2 align="center" | 농림수산부 장관
| align="center" | [[1987년]] [[1월 1일]] ~ [[1987년]] [[5월 18일]]
|-
| align="center" | 38대
| align="center" | [[김주호 (1933년)|김주호]](金周浩)
줄 525 ⟶ 550:
|-
| rowspan=5 align="center" | 건설부 장관
| align="center" |
| align="center" | [[김주남]](金周南)
| align="center" | [[1980년]] [[9월 2일]] ~ [[1982년]] [[1월 4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김종호 (1926년)|김종호]](金宗鎬)
| align="center" | [[1982년]] [[1월 4일]] ~ [[1983년]] [[10월 15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김성배 (1927년)|김성배]](金聖培)
| align="center" | [[1983년]] [[10월 15일]] ~ [[1986년]] [[1월 8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이규효]](李圭孝)
| align="center" | [[1986년]] [[1월 8일]] ~ [[1987년]] [[12월 15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최동섭]](崔同燮)
| align="center" | [[1987년]] [[12월 15일]] ~ [[1988년]] [[12월 5일]]
|}
줄 593 ⟶ 618:
| align="center" | 4대
| align="center" | [[이헌기]](李憲琦)
| align="center" | [[1986년]] [[8월 27일]] ~ [[1988년]] [[2월 24일]]
|}
줄 611 ⟶ 636:
|-
| align="center" | 29대
| align="center" | [[이희성 (1924년)|이희성]](李熺性)
| align="center" | [[1982년]] [[5월 21일]] ~ [[1983년]] [[10월 15일]]
|-
줄 667 ⟶ 692:
|-
| rowspan=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이광표]](李光杓)
| align="center" | [[1980년]] [[5월 22일]] ~ [[1982년]] [[5월 20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이진희 (언론인)|이진희]](李振羲)
| align="center" | [[1982년]] [[5월 21일]] ~ [[1985년]] [[2월 18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허문도]](許文道)
| align="center" | [[1983년]] [[5월 4일]] ~ [[1983년]] [[5월 20일]]
|-
| align="center" | 15대
| align="center" | [[이원홍 (1929년)|이원홍]](李元洪)
| align="center" | [[1985년]] [[2월 19일]] ~ [[1986년]] [[8월 26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이웅희 (1931년)|이웅희]](李雄熙)
| align="center" | [[1986년]] [[8월 27일]] ~ [[1988년]] [[2월 24일]]
줄 695 ⟶ 724:
|-
| rowspan=5 align="center" | 총무처 장관
| align="center" |
| align="center" | [[김용휴]](金容烋)
| align="center" | [[1979년]] [[12월 14일]] ~ [[1982년]] [[5월 20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박찬긍]](朴贊兢)
| align="center" | [[1982년]] [[5월 21일]] ~ [[1985년]] [[2월 18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박세직]](朴世直)
| align="center" | [[1985년]] [[2월 19일]] ~ [[1986년]] [[1월 7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정관용 (1935년)|정관용]](鄭寬溶)
| align="center" | [[1986년]] [[1월 8일]] ~ [[1987년]] [[7월 13일]]
|-
| align="center" |
| align="center" | [[장기오]](張基梧)
| align="center" | [[1987년]] [[7월 14일]] ~ [[1988년]] [[2월 24일]]
줄 728 ⟶ 757:
| align="center" | 5대
| align="center" | [[이정오]](李正五)
| align="center" | [[1980년]] [[9월
|-
| align="center" | 6대
줄 746 ⟶ 775:
| align="center" | [[1987년]] [[7월 14일]] ~ [[1988년]] [[2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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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col-begin}}
{{col-3}}
* [[대한민국의 역대 대통령]]
* [[1981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col-3}}
* [[전두환]]
* [[노신영]]
줄 787 ⟶ 789:
* [[허화평]]
* [[허삼수]]
{{col-3}}
* [[12·12 군사 반란]]
*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줄 792 ⟶ 795:
* [[아웅산 묘역 폭탄테러사건]]
* [[6월 항쟁]]
{{col-end}}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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