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산텐의 노르베르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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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노르베르토는 사제로 서품받는 것을 계속 회피하였으며, 1113년에는 [[캉브레]]의 교구장 주교 서임을 제의받았으나 역시 거절하였다. 하루는 말을 타고 인근의 [[브레덴]]으로 갔는데, 갑자기 태풍이 불면서 번개가 그가 탄 말의 발에 내리쳤다. 이에 놀란 말이 날뛰자 노르베르토는 말에서 굴러 떨어져 거의 한 시간 동안 의식을 잃은 채 누워 있었다.<ref name=college>[http://www.snc.edu/livingnorbertine/norbertines/norbert.html "Norbert of Xanten", St. Norbert College, De Pere, Wisconsin]</ref> 거의 죽을 뻔한 사고를 겪은 이후 그의 신앙심은 훨씬 깊어졌다. 그는 궁정 사제로 초빙하려는 하인리히 5세 황제의 요청을 거절하고 참회의 삶을 살고자 크산텐으로 돌아가서 그곳 수도원의 [[아빠스]] 코노의 지도를 받았다. 1115년 코노가 아빠스직에서 물러나자 노르베르토는 퓌어스텐베르크에 수도원을 설립하고서 자신의 재산 일부와 함께 코노와 그의 [[베네딕토회]] 후계자들에게 양도하였다. 당시 노르베르토의 나이는 35세였다. 그 후 노르베르토는 사제 서품을 받았다. 노르베르토는 특히 [[성체]]와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이 지극하였다.
한편 그는 금욕주의를 매우 극단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그의 첫 제자 세 명이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또한, 그는 크산텐의 의전사제단을 쇄신하고자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1118년 [[프리츨라르]]에서 열린 교회회의에서 노르베르토의 쇄신안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노르베르토는 자신의 성직록을 반납하고 전재산을 매각하여 얻은 대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교황 젤라시오 2세]]를 알현하여 순회 사제가 되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리하여 노르베르토는 오늘날의 독일 서부와 벨기에, 프랑스 북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두로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상대로 설교하였으며 많은 기적을 행하였다. 그는 방문하는 곳마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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