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4번째 줄:
==원자 정호 사태==
[[1688년]] [[희빈 장씨|후궁 장씨]](소의 장희빈)가 아들 [[조선 경종|윤(昀)]](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송시열 등은 [[송 철종|송나라 철종]]의 고사를 예로 들기도 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
 
===복위===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숙종이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들을 기용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는데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하지만 이 당시 숙종은 폐인(민씨)를 신원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린다는 명을 내려 왕비를 교체할 마음이 없음을 선포했다. 하지만 4월 9일, 숙종은 마음을 바꾸어 민씨를 서궁으로 이전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고, 4월 12일 서궁으로 입거한 그녀에게 왕비 복위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왕비였던 장씨는 국모가 둘일 수 없다는 이유로 왕비의 아래 지위인 빈으로 강등되어 본래의 희빈의 작호를 돌려 받았다.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애초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던 탓이다.<ref>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노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은 폐비를 별궁(別宮)에 옮기려 한다.’</ref>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ref>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ref>,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ref>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 </ref>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ref>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하였던 노론과 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다..<ref group="주석">숙종실록에는 소론의 반발과 윤지완 등이 단체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대신 숙종실록에는 '거칠고 학식이 없어 무식한 소수의 무리(서문중, 윤지완 등을 지목함)'가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를 잃어' '뒷날의 화복(세자의 즉위)만 생각하고', '흉당(남인과 희빈)에 아부하였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더러워했다.'는 표현을 수차례 반복해 다른 기사에 나누어 실었다.</ref>
 
이에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인 [[남구만]]이 '민씨의 복위는 이미 정해졌으니 이에 대해 거론하여 다투는 것은 아들이 어머니에 대해 논하고 신하가 임금에 대해 의논하는 것이니 천하의 도리에 맞지 않으며, [[희빈 장씨|희빈]]의 강호는 죄가 있어서 폐출된 것이 아니라 민씨가 복위함에 있어 왕비가 둘이 있을 수 없으니 부득이한 것이다'고 선언하여 노론과 소론을 중재하였다. 이로 인해 민씨의 복위가 결정되었지만 노론과 소론의 사이엔 깊은 골이 생겼으며 노론은 장씨의 친정 오라비인 장희재에게 칼 끝을 돌려 [[남인]]과 함께 제거하려 하였지만 노론의 행위를 [[희빈 장씨]]와 왕세자([[조선 경종|경종]])을 제거하기 위한 단계임을 안 [[남구만]]과 소론의 강력한 제지로 [[남인]] 영수 [[민암]] 부자만을 죽일 수 있었을 뿐 장희재는 목숨을 유지하여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 정식으로 왕비 책봉을 받았다.
 
[[경종실록]]에 따르면 민씨가 복위된 뒤 왕세자 윤(경종)이 민씨 아래로 입적되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서자로서 아비의 뒤를 잇는 자는 적모에게 입적한다'는 예를 따른 것으로 흔히 알려진 것처럼 숙종이 장씨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민씨에게 줘버렸다는 것은 와전이다. 경종 기사환국 전 원자 명호를 받았을 때에도 당시 정궁이었던 민씨에게 입적되었었다.<ref group="주석">이는 [[인원왕후]]와 [[조선 영조|영조]], [[정성왕후]]와 [[사도세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자로 만들기 위해 정궁의 양자로 입적시켰다는 해석은 오류이다.</ref>
 
{{인용문|원자(元子)에게 이미 진호(進號)하여 위로 적후(嫡后)에게 올렸으니, 바로 중궁(中宮)의 아들인 것입니다.|『숙종실록 15년 4월 25일(신묘) 10번째기사 中』}}
 
== 말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