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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술환국과 복위===
폐출된 지 5년이 지난 후인 [[1694년]] 4월 1일,
이에 대해 서인이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애초 노론은 폐비 민씨의 복위를 주장하였던 반면에 소론은 장씨의 왕후직을 그대로 둔 채 궐 밖 사가에 거주 중인 민씨가 궐 내 서궁에 입주하기만을 주장하였던 탓이다.<ref>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일(무진) 2번째기사 ‘노당은 폐비를 복위시키려 하고, 소당은 폐비를 별궁(別宮)에 옮기려 한다.’</ref> 숙종의 명이 번복되자 병조판서 [[서문중]]과 이조참판 [[박태상]] 등의 소론 거두들은 민씨가 먼저 왕비였고 더 오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세자의 어미인 장씨가 더 귀하니 장씨가 강등되고 민씨가 복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고<ref>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2일(기묘) 6번째기사 </ref>,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ref>숙종실록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 </ref> 뒤이어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줄을 이어 사직상소를 올리는<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ref> 등 강경한 거부 의사를 보여 [[갑술환국]]이 있기까지 합심하였던 노론과 소론이 강하게 대립하게 되었다..<ref group="주석">숙종실록에는 소론의 반발과 윤지완 등이 단체로 사직 상소를 올린 기록이 완전히 누락되어 있고 승정원일기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 대신 숙종실록에는 '거칠고 학식이 없어 무식한 소수의 무리(서문중, 윤지완 등을 지목함)'가 '의리가 어두워지고 윤리를 잃어' '뒷날의 화복(세자의 즉위)만 생각하고', '흉당(남인과 희빈)에 아부하였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더러워했다.'는 표현을 수차례 반복해 다른 기사에 나누어 실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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