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반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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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경연(經筵) 폐지·신언패(愼言牌) 실시·[[성균관]](成均館)의 연락(宴樂) 장소화·도성 밖 30리 내의 민가 철거·언문 도서의 폐기 등 폭정을 일삼았다. 그리고 [[원각사지|원각사]](圓覺寺)를 폐하여 연방원(聯芳院)으로 고치고, 흥청(興淸)들과 기거를 함께하며 채청사(採靑使)를 각 지방에 보내 미녀를 끌어들이고, 유희와 안락으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였다. 이에 훈구 세력을 중심으로 반정의 움직임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 경과 ==
전 이조참판(吏曹參判) [[성희안]](成希顔)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원종]](朴元宗), 이조판서(吏曹判書) [[유순정]](柳順汀),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신윤무]](辛允武) 등과 함께 왕이 장단(長湍) 석벽(石壁)을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왕의 행차가 취소되면서 거사에 차질이 생겼고, 이때 호남 지역에서의 연산군 폐위 거사 격문이 서울에 나돌게 되면서 결국 당초 계획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유순정을 비롯하여 전 수원부사(水原府使) [[장정 (張珽조선)|장정]],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 [[박영문(朴永文)]], 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은 훈련원에서 무사를 규합한 뒤, [[폐비 신씨|왕비 신씨의신씨]]의 오라버니 [[신수근]](愼守勸)과 그 아우 신수영(愼守英) 및 [[임사홍]](任士英) 등 연산군의 측근을 제거한 뒤,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경복궁에 들어가 자순왕대비의[[정현왕후|자순왕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하여 강화도 교동(喬桐)에 안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진성대군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 결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