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8번째 줄:
 
#. 지금까지 여러 호족들이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부민(部民)과 전장(田莊)을 폐지하고 그 전답과 백성은 모두 천황의 것으로 한다(공지공민제).
#. 기존의 구니(國), 고오리(郡), 아가타(縣), 고오리(縣) 등을 정리하고 영제국(令制國)과 그에 부수한 고오리(郡)로서 정비한다(국군제도). <ref>국군제도는 과거 호족의 세력권이던 구니나 아가타 등을 정비하여 오늘날과 같은 구니의 모습으로 다듬어져 갔지만, 실제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된 것은 개신의 조 이후 몇 년이 지나서의 일이다.</ref>
#. 호적과 계장(호구 대장)을 만들어 나라에서 공민(백성)에게 공지(논밭)를 나누어 준다(반전수수법). <ref>50호를 1리로 하고 장(長) 1인을 둔다. 이장은 마을 안의 호구를 조사하고, 농경과 양잠을 권하며, 법을 위반하는 자를 단속하고, 부역에 고을 사람을 징발하는 것을 관장한다.</ref>
#. 예로부터 내려오는 부역 제도를 폐지하고, 논밭을 기준으로 각 고을의 특산물을 바치게 한다([[조용조]]). <ref>비단 · 명주 · 무명 등은 지역마다의 사정에 따라 골라 낼 수 있으며 이와는 별도로 호(戶)별로 특산물을 바치도록 한다. <ref>일본서기(日本書記)</ref>
 
이 밖의 다른 제도에 대해서도 큰 개혁이 이루어졌다.
 
; 박장령(薄葬令)
: 지금까지의 능묘(陵墓)는 자유롭게 제작되어 왔으나, 신분에 따라 제작 가능한 능묘의 규모가 규제되었다. 순사(殉死) 금지, 천황의 능묘왕릉 제작에 걸리는 시간은 7일 이내로 제한한다는 등의 규제책이 마련되었다(이 박장령으로 일본은 [[고분 시대]]를 사실상 청산했다).
; 습속 개혁
: 남녀의 법 정리
49번째 줄:
 
다이카 개신의 주요 정책들은 당시 [[견당사]](遣唐使)를 통해 유입된 정보를 바탕으로 당의 관료제와 유교(儒敎)를 적극 수용한 부분이 보이지만, 기존의 씨족 제도를 한번에 바꾸지는 못하고 일본식으로 상당히 변경된 부분도 보인다.
 
정치 제도 개혁과 함께 외교면에서는 다카무코노 구로마로를 [[신라]](新羅)에 파견하기도 했으며, 당에는 견당사를 보내어 법제와 문화 수입에 힘썼다. 또한 고시(越) 땅에 누타리(渟足)와 이와후네(磐舟) 두 목책을 쌓아 [[도호쿠 지방]](東北地方)의 [[에미시]](蝦夷)에 대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순조롭게만 진행되지 못해서, 다이카 4년([[648년]]) 개정된 관위 13계를 좌대신과 우대신조차 그에 따라 관을 착용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일본서기》는 기록되어 있다. 다이카 5년([[649년]])에는 좌대신 아베노 우치마로가 죽고, 우대신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모반 혐의를 받아 야마다사(山田寺)에서 자결하였다. 무고함이 후에 드러나긴 했지만 그 뒤 대규모 정치 개혁의 움직임은 줄어들었으며, [[650년]]에 연호가 [[하쿠치]](白雉)로 바뀌면서 일단 다이카 개신은 끝이 났다.
 
== 그 뒤 ==
고토쿠 오키미와 나카노오에의 불화로 하쿠치 4년([[653년]]) 나카노오에노 미코가 나니와를 떠나 아스카로 돌아가 버리면서 군신들은 모두 나카노오에를 따랐고, 고토쿠 오키미는 완전히 고립된 채 울분 속에서 이듬해 서거한다(이 불화의 배경은 고토쿠 오키미와 나카노오에 사이의 권력 다툼과 외교 정책의 대립이 지적되고 있으나 부족한 점이 많다). 이번에도 황태자인 나카노오에는 자신이 즉위하는 대신 어머니 고교쿠를 다시 즉위시킨다([[사이메이 천황|사이메이 오키미]]).
 
사이메이 오키미의 시대에는 아베노 히라후(阿倍比羅夫)를 도호쿠 지방으로 보내어 에미시를 토벌하게 하는 등 지배권을 넓혔으나, 한편으로 정치 불안이 계속되어 [[658년]]에는 아리마노 미코(有間皇子)가 모반을 꾀하다 처형되기도 했다.
 
[[660년]], 왜의 전통적인 우호국이었던 [[백제]](百濟)가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하였다. 백제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661년]] 백제로의 구원병을 파병하는 것이 결정되고 사이메이 오키미와 나카노오에가 함께 지쿠시(筑紫)까지 나아가기도 했으나, 사이메이 오키미는 지쿠시에서 그만 서거하고, 백제에 보냈던 구원군도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나 ・ 당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궤멸당한다. [[668년]]에는 [[고구려]](高句麗)까지 멸망하고 대륙의 공격 위협에 노출된 상태에서 나카노오에는 [[지쿠젠 국|지쿠젠]](筑前)이나 [[쓰시마 국|쓰시마]](対馬) 등지에 미즈키(水城)를 쌓고 사키모리(防人)나 봉수대를 설치하며, 오쓰 궁(大津宮)으로 천도하는 한편 기존의 부곡(部曲)을 부활시키고 호족간 융화를 꾀하는 등 국토 방위를 중심으로 국내 제도 정비에 힘을 쏟았다. 이때까지 「칭제(稱制)」 형식으로 국정을 지휘하며 즉위식을 미루어오던 나카노오에는 668년에야 오키미로 즉위하였다([[덴지 천황|덴지 오키미]]). 670년에는 새로운 호적을 만들고(경오년적) [[671년]]에는 최초의 율령법전인 「오미령(近江令)」을 시행하였다.
 
671년에 덴지 오키미가 서거하고, 덴지 오키미의 동생 오오아마노 미코(大海人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와 덴지 오키미의 아들 [[고분 천황|오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 사이의 불화로 [[672년]] [[임신의 난]]이 일어난다. 오오아마노 미코는 이 난에서 승리하고 즉위하였으며, 최초로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형 덴지 오키미보다 더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