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카 개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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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년에 덴지 오키미가 서거하고, 덴지 오키미의 동생 오오아마노 미코(大海人皇子, 훗날의 [[덴무 천황]])와 덴지 오키미의 아들 [[고분 천황|오오토모노 미코]](大友皇子) 사이의 불화로 [[672년]] [[임신의 난]]이 일어난다. 오오아마노 미코는 이 난에서 승리하고 즉위하였으며, 최초로 「천황(天皇)」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형 덴지 오키미보다 더 강력하게 개혁을 추진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기에 이른다.
 
== 다이카 개신의 의문점 ==
일본 역사에서 다이카 개신이 높게 평가된 것은 [[에도 막부]] 말기 [[기슈 번]](紀州藩)의 중신(重臣)이었던 다테 지히로(伊達千広, 무쓰 무네미쓰의 친아버지)가 『대세삼전고(大勢三転考)』를 저술하면서 처음으로 그 역사적 가치를 발견했고 그것이 메이지 시대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나 다이카 개신은 다이카 시대(645년에서 650년까지)에 한정되지 않고 고토쿠 오키미 및 나카노오에노 미코(덴지 오키미), 덴무 천황, 그리고 [[지토 천황]](持統天皇)의 전제 통치화를 통해 이루어진 일련의 개혁이라는 설이 요즘은 뿌리깊게 되어 있다.
 
*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는 쿠데타가 「삼한(三韓)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자리」에서 거행되었다는 점. 당시의 상식으로서는 외교 의식 도중에 쿠데타가 일어날 수가 없다(외국의 사절에게 「우리 나라는 현재 내분 중이다」 즉 지금이 자국을 도모할 절호의 기회라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셈). 또한 「삼한의 사신」이 온다고 이루카를 속여서 암살 현장으로 불러낸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허구를 당시 국가 정책의 중심에 있던 이루카가 몰랐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ref>中村修也 『偽りの大化改新』(講談社、2006年)</ref> 다만 몇 년 뒤의 백강구 전투로까지 이어지는 움직임이 있었고 당시의 정보 전달망을 생각하면 꽤 빠른 시간에 중국이나 한반도 관련 국가들이 왜에서의 쿠데타를 알았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다. 또한 이루카 자신이 불온한 소식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한들 그것이 소가 씨에 대한 불만이며 일상적으로 나도는 소문이었다면 굳이 마음에 두지 않고 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지적도 따른다.
* 조칙을 공포한 날이 「봄 정월 갑자 초하루(즉 정월 초하루)」인 점. 연초에 조칙을 내는 경우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정월 초하루에 발포되었을 가능성은 적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 일본에서 「고오리」를 「郡」이라는 한자로 표기하는 것은 [[다이호 율령]](大宝律令)이 제정된 뒤의 일로, 그 이전에는 「評」을 사용한 것을 목간 등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개신의 조 제1조에서 공지공민(公地公民), 즉 호족 소유의 사지사민(私地私民) 폐지를 외치면서도 도모노 미야쓰코나 구니노 미야쓰코(国造)가 소유한 부곡과 전장에 대해서는 그 소유권을 인정했다.
* 「호적(戸籍)」, 「계장(計帳)」, 「반전수수(班田収授)」 등의 단어는 다이호 율령에서 처음 보이는 용어로 그 이전의 문서에는 나오지도 않는다.
* 개신의 조에서 「처음으로 경사(京師)를 수리하였다」고 했지만 실제 야마토 왕권이 도성제(都城制)를 도입한 것은 [[694년]] 후지와라쿄가 최초였다.
* 연호가 띄엄띄엄 기록되었거나 아예 없었던 시대도 존재한다. 실제로 일본에서 연호 제도가 정착된 것은 다이호(大宝) 원년으로 그때까지 일본에 연호 제도라는 것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 다이카 2년(646년)에 내려진 박장령에 따라 최초로 「화장(火葬)」된 군주는 지토 천황이 최초이며(남편인 덴무 천황과 「합장」된 것도 덴무 천황이 최초이다), 조를 반포한 고토쿠 오키미 본인조차 박장령을 따르지 않았다(고토쿠 오키미는 654년, 지토 천황은 703년에 서거).
* 소가노 에미시, 이루카 부자가 죽은 뒤에도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개신 정권에서 우대신을 맡는 등 소가 씨는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다이카 4년에 이시카와마로가 죄를 뒤집어쓰고 자결하긴 했지만 이 또한 다이카 정권의 기반이 취약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가 씨의 세력권이었던 아스카를 떠나서 나니와 궁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아스카로 돌아왔으며, 덴지 오키미의 시대에야 아스카에서 오미로 조정을 옮겼고, 임신의 난에서 승리한 오오아마노 미코는 다시 조정을 아스카로 돌렸다. 일본 황실이 아스카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694년]]의 후지와라쿄 천도 때부터였으며, 701년에 다이호 율령이 반포되었다.
 
이러한 점 등을 들어 7세기 중후반에 다이카 개신 같은 모종의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비교적 그 견해가 일치하지만, 그 시기는 645년보다 더 이후로 설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나카노오에노 미코는 씨족 내의 내부 갈등을 이용해 세력을 꺾고 왕실의 힘을 뻗쳐 나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일본에서 왕권이 강해진 이유의 하나로서는 임신의 난을 고려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율령제도가 완성된 것은 다이호 율령에 의해서였으며, 그 다이호 율령을 중심으로 《일본서기》가 풀어 기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가 아버지 가마타리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