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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정사 《[[삼국지]]》에서는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평가되고 있는평가되는 책사로, 많은 인물을 섬겼으나 가는 곳마다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인정받았으나 젊은 시절에는 그다지 평가받지 못하고못하지만, 다만 [[염충]]이라는 인물만 “[[장량]]과 [[진평]](모두 [[전한 고조|한 고조]]의 모신)과 같은 기략이 있다.”라고있다”고 평가한다. 처음에는 효렴으로 추천되어 조정 관직에 취임했으나,때문에탓에 고향으로 돌아오는귀향하는 도중, 저족 반란군에 사로잡히고 만다.생포된 그때 자신을 그 지방에서 권위가 있는 장군의 친척이라고 속이자, 이에 겁을 먹은겁먹은 반란군이 석방해주어석방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벗어났다.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에서 권세를 장악하고 있을장악할 무렵, 동탁의 부하이자 사위인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되자 동탁의 부하 [[이각 (후한)|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 (후한)|장제]](張濟) 등이위시한 동탁의 부하가 동요하여 군대를 버리고 도망치려 했으나, 가후는 그들을그 사람들을 설득하고 단결시켜 장안을 습격하고 여포를 추방했다. 이 때문에추방했으므로, 《[[삼국지|정사]]》에 주석을 단주석한 [[배송지]]로부터 다시에게 화를 초래한재초래한 자로사람으로 미움을 사서 여러 군데에서 비판받고비판받으나 가후는 이 공적으로 높은 관직에 취임하려 하지 않고, 관리 선발 임무를 맡아 많은 유명인을 등용하여 조정의 정치 체제 개선에 애썼지만, 이것이 도리어 [[이각 (후한)|이각]]에게는 거북한 상대로 간주돼 동향 출신인 [[단외]](段煨) 밑에 몸을 의지하는데 단외가 자신을 두려워하자 그 사람의 곁을 떠나 장수 밑으로 들어간 때 가족은 단외가 있는 곳에 남아 있었는데 가후는 “단외는 나를 경계하니 내가 떠나면 즐거워하겠고 밖에서 강력한 지원자와 결합하리라고 기대하고서 가족을 후대하리라”고 판단했는데 그 있다예상대로였다.
 
이 무렵 [[장수 (후한)|장수]]는 [[조조]]와 항전하고 있었는데,항전했는데 가후의 의견을 듣지 않았을 때는 패배하고, 가후의 계략을 이용했을 때는 승리했다. 조조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는데, 조조는 이 전투에서 맏아들장남 [[조앙]](曹昻)을 잃게 된다. 그 후 조조가잃고서 거짓으로 성곽 서북쪽을서북을 공격해 세력이 약해진 동남쪽을동남을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역으로 복병을 놓아 조조를 유인하려 체포하려고유인하여 하는체포하려는 등 허허실실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가후는 이 공적으로 높은 관직에 취임하려 하지 않고, 관리 선발 임무를 맡아 많은 유명인을 등용하여 조정의 정치체제 개선에 애썼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이각 (후한)|이각]] 등에게는 거북한 상대로 여겨져 동향 출신인 [[단외]](段煨) 밑에 몸을 의지하는데, 단외가 자신을 두려워하자 그의 곁을 떠나 장수 밑으로 들어간다. 이때 가족은 단외가 있는 곳에 남아 있었는데, 가후는 “단외는 나를 경계하고 있으니 내가 떠나면 즐거워할 것이며, 밖에서 강력한 지원자와 결합할 것을 기대하고 가족을 후하게 대우해줄 것이다” 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대로였다.
 
나중에 [[원소 (후한)|원소]](袁紹)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두 사람은 장수와 가후를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각각 사람을 보내왔다. 이때 가후는 “[[원소 (후한)|원소]]는 형제 [[원술]]조차 신뢰하지 않고, 세력도 강력하기 때문에강력해서 우리를 가벼이 보고경시하고 중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않겠는데 조조는 천자(天子)를 받들고 있고, 세력이 열세이므로 자기 편이 늘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원하므로 과거의 개인적인 원한 등은사원은 문제 삼지 않고 우리들을 중용할우리를 것이틀림없이 틀림없다중용하리라.” 라고 장수에게 진언해 조조에게 붙을 것을투항하라고 권한다. 조조는 그들의그 사람들의 귀순을 기뻐하고, 가후의 손을 잡고 “나에게“내게 천하 사람들의천하인들의 신뢰를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그대다” 라고 말하며말하면서 그를가후를 집금오에 임명했다.
이 무렵 [[장수 (후한)|장수]]는 [[조조]]와 항전하고 있었는데, 가후의 의견을 듣지 않았을 때는 패배하고, 가후의 계략을 이용했을 때는 승리했다. 조조의 목숨까지 위협할 정도였는데, 조조는 이 전투에서 맏아들 [[조앙]](曹昻)을 잃게 된다. 그 후 조조가 거짓으로 성곽 서북쪽을 공격해 세력이 약해진 동남쪽을 공격하려 하자, 가후는 역으로 복병을 놓아 조조를 유인하려 체포하려고 하는 등 허허실실 전략을 구사했다.
 
또한조조를 받들게 된 가후는 수많은 책략을 내놓았다. 관도 전투에서는 결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고 서량에서 [[마초 (촉한)|마초]]와 [[한수 (후한)|한수]]가 반란했을 때는 그 사람들에게 이간책을 쓰고자 일부러 군데군데 자를 지운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 마초를 의심하게 하여 사이를 벌려놓고 통제되지 않는 곳을 습격해 토벌에 성공하며, 후계자 문제에 관해서도 [[조비]]와 [[조식 (조위)|조식]](曹植) 사이에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진행됐는데 [[조비]]는 자기 입장을처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하고자 가후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구했다. 가후는 누구를 대하든 겸허하게 행동하고, 태자로서 성실히 임할임하라고 것을 조언했다. 또한조언했으며, 조조도 은밀히 상담했는데,상담하자 가후는 곧바로 대답하지즉답하지 않고 “[[원소 (후한)|원소]]와 [[유표 (후한)|유표]](劉表)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생각한다”고 말하여, 맏아들을장남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에않았기에 멸망한 사례를 들어 태자의 지위를 확정시켰다.
나중에 [[원소 (후한)|원소]](袁紹)와 조조가 관도에서 대치할 때 두 사람은 장수와 가후를 서로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각각 사람을 보내왔다. 이때 가후는 “[[원소 (후한)|원소]]는 형제 [[원술]]조차 신뢰하지 않고, 세력도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를 가벼이 보고 중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조조는 천자(天子)를 받들고 있고, 세력이 열세이므로 자기 편이 늘어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개인적인 원한 등은 문제 삼지 않고 우리들을 중용할 것이 틀림없다.” 라고 장수에게 진언해 조조에게 붙을 것을 권한다. 조조는 그들의 귀순을 기뻐하고, 가후의 손을 잡고 “나에게 천하 사람들의 신뢰를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그대다” 라고 말하며 그를 집금오에 임명했다.
 
다른 사람들이타인들이 자신의 재능에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않게끔 조용히 생활하고, 사적인절대로 교제를사사로운 절대 하지교제하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혼인 상대도 명문 집안명문대가 출신을 고르지 않았다고 한다않았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이후임명되고서 천수를 누려 나이 77살에 사망했으며,죽었고 [[시호]] 숙후(肅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f>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ref>
조조를 받들게 된 가후는 수많은 책략을 내놓았다. 관도 전투에서는 결전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조조에게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로 이끌고, 서량에서 [[마초 (촉한)|마초]]와 [[한수 (후한)|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그들에게 이간책을 쓰기 위해 일부러 군데군데 글자를 지워버린 편지를 한수에게 보내, 마초를 의심하게 하여 사이를 벌려놓고, 통제가 안되는 곳을 습격해 토벌에 성공한다.
 
또한 후계자 문제에 관해서도 [[조비]]와 [[조식 (조위)|조식]](曹植) 사이에 활발하게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조비]]는 자기 입장을 확실히 하기 위해 가후에게 사람을 보내 의견을 구했다. 가후는 누구를 대하든 겸허하게 행동하고, 태자로서 성실히 임할 것을 조언했다. 또한 조조도 은밀히 상담했는데, 가후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원소 (후한)|원소]]와 [[유표 (후한)|유표]](劉表)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여, 맏아들을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 사례를 들어 태자의 지위를 확정시켰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에 경계심을 품지 않도록 조용히 생활하고, 사적인 교제를 절대 하지 않고, 자녀들의 결혼 상대도 명문 집안 출신을 고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이후 천수를 누려 나이 77살에 사망했으며, 숙후(肅侯)라는 [[시호]]가 내려졌다.<ref>순욱순유가후전(荀彧荀攸賈詡傳)</ref>
 
== 평가 ==
세인들은 주자학이 흥성하기 전에는 “한 번도 실패한 계책을 내지 않았다.”라는않았다”고 가후를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호평했으나 주자학이 성립한성립하고서는 뒤로는주군을 그가 여러 차례 주군을수차 바꾼 행위행위를 등을거론하면서 거론하며호평하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였다않았다.
《[[삼국지]]》 연구에 대해연구로써 유명한 중국의[[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학자역사학자인 이중톈교수 교수는이중톈은 가후를 [[제갈량]](諸葛亮)보다 훌륭한 책략가였으며 처세술에 능해 난세를 살면서도 천수를 누린 몇 안되는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평가한다호평한다.
 
== 가후의 친족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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