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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Zhong yao.jpg|thumb|right|종요]]
'''종요'''(鍾繇, [[151년]] ~ [[230년]])는 [[중국]] [[후한]] 말 ~ [[삼국시대]] [[위 (삼국)|위나라]]의 정치가이자 서예가로, [[자 (이름)|자]](字)는 원상(元常)이며,이고 [[예주]](豫州) 영천군(穎川郡) 장사현(長社縣) 사람이다.
 
== 생애 ==
[[조조]](曹操)의 휘하에서 [[옹주]](雍州)의 내정과 치안유지를치안 유지를 담당했다.
 
처음엔 후한의 신하로써신하로서 [[헌제]](献帝)를 섬겼으나, 헌제가 [[조조]]의 비호를 받게되면서,에게 같은비호받으면서 고향동향 출신이었던 [[순욱 (후한)|순욱]](荀彧)의 천거로 [[조조]]를 섬기게 되었다. 그섬긴 후 [[장안]](長安) 지역의 통치통치와 치안을 치안위시한 내정 내정면에서면에서 [[장기 (조위)|장기]](張旣)와 더불어 큰 공적을 세웠기에 위나라의 [[상국]](相國;[[재상]])으로까지 승진했다. [[219년]] [[위풍]](魏諷)의 반란 때 그를그 사람을 공직에 추천한 사람이 종요였기 때문에종요였기에 추궁받아 일시적으로일시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조비]](曹丕)가 황제로 황제즉위 즉위후 태위(太尉)로써로서 복귀하였다.복귀했으나 그러나[[조비]가 이혼한 아내와 재결합할 것을 [[조비]]가재결합하라고 명하자, 분개하여 자해하는 맘으로 산숙을 한꺼번에 먹어 인후에 지장이 초래해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아 말을말할 수가 없었다.
 
아들 [[225년종회]] 아들얻은 [[종회225년]]를 보았으며 이때 종요의 나이가 75살로 종회는 종요의 전무후무한 늦둥이였다. 그 후 종요는 [[230년]] 80세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성후'''(成侯).
 
== 서예 ==
종요는 서예가로써서예가로서 교묘한 [[소해]](小楷)의 서법(書法)으로 그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예서와 행서에도 매우 뛰어났다탁월했다. 해서가 특히 유명하였는데, 삼국시대에서는 해서란 말이 없었고, 후세의 서예가들에 의해서예가들이 해서에 해당되지는 않는 것이라않는다고 하여,주장하여 예서와 해서의 중간에 위치하는 서체라 했다. 이것을 [종육체]라고 불렀다. 종요의 해서는 서성 [[왕희지]](王羲之)을 시작으로 매우 많은 서예가들이서예가가 공부하면서 현대에까지도 전해지고 있다전해진다.
 
== 《삼국지연의》에서의에서 종요 ==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 (촉한)|마초]](馬超)의 침공에 맞써 장안의 수비를 맡아 이들을이 사람들을 격파하였으나, 동생 [[종진 (삼국지연의)|종진]](鍾進)이 [[방덕]](龐德)에게 죽음을살해된 당했다. 이후 [[조예]](曹叡) 때에는 예전에 좌천된 [[사마의]](司馬懿)을 등용하라고 진언하는 등 유능한 참모로써참모로서 묘사되었으며, 차남 [[종회]](鍾會)가 [[사마소]](司馬昭)에게 명받아 촉을 멸하여 대공을 세우는 과정에서 촉의 항복한 무장 [[강유]](姜維)와 공모해 반란을 꾀하였으나 종회와 강유는 [[사마소]]에게 다시 토벌당해 묘사되었다죽는다.
 
또한 차남 [[종회]](鍾會)가 [[사마소]](司馬昭)의 명을 받아 촉을 멸하여 큰 공을 세우는데, 그 과정에서 촉의 항복무장 [[강유]](姜維)와 공모해 반란을 꾀하였으나 종회와 강유는 [[사마소]]에게 다시 토벌당하여 죽음을 맞는다.
 
== 종요의 친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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