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잘루트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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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르스는 몽골의 침공을 막아낸 영웅으로서 카이로에 개선하여 이집트, 시리아의 왕으로써 확고한 지위를 쌓았다. 그 후에도 매년 벌어진 몽골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둔 바이바르스는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온 약소자들이었던 맘루크들을 안정한 정권의 주인으로 상승시키는 데 성공해, 사실상 맘루크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
 
한편 아인잘루트 전투 이전에 귀환했던 몽골제국의 훌라구는 아제르바이잔의 [[타브리즈]]에 이르러, 둘째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쿠브케]]가 칸의 지위를 놓고 내분이 시작되는 것을 알고는 이 땅에 머물기로 하고, 이란-이라크를 세력권으로 삼아 자립하였다. 이때부터 훌라구의 자손에 의한 세습이 이루어지게 된 이란에 위치한 몽골왕국을 [[일한국일 한국]]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의 결과 팔레스타인은 맘루크 왕조의 영토가 되었고, 그 후에도 일 한국 왕조와 맘루크 왕조 사이에 레바논, 시리아를 둘러싼 대립이 계속되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양국의 각축전은 [[킵차크 한국]](주치 우르스) 및 [[비잔틴 제국]], 서유럽 여러나라를 포함시키게 되어, 13세기 후반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외교전으로까지 번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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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맘루크 왕조의 군대가 몽골제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례는 이미 [[1221년]]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딘]]의 군단이 시기 쿠토쿠가 이끄는 3만기병을 격파한 [[아프가니스탄]]의 [[파르완 전투]]가 있어, 엄밀히 말하자면 처음은 아니었다.
 
한편 [[집사]](集史) 등 몽골제국 측의 페르시아어 사료에서는 [[전초전]](前哨)이 아닌 [[국지전]](局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몽골측 입장에선 이 전투에 참가했던 몽골제국군은 훌라구의 귀환으로 인해 시리아에 남아있던 주력군의 일부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기타 몽골제국군이 실패한 전투는 후일 몽골측에게 반격을 받아 패주하거나 괴멸당하는 상황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아인잘루트 전투는 다른것에 비해 인상이 희박할 수밖에 없다. 아인잘루트 전투가 인상적인 이유는 놀랍게도 그 후 몽골측의 정정(政情)이 놀랍도록 변화하여 레바논, 시리아 탈환의 기회를 잃어버렸고, 결과적으로 이 지역들도 맘루크 왕조 통치하에 있게되는 결정적인 전투가 되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일 한국 ]]에서는 1260년 이후 훌라구, [[아바카]] 등은 킵차크 한국과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차가타이 한국]]과는 호라산 지역의 국경지역 분쟁에 신경을 썼기에 바이바르스가 지배하던 시리아 국경지역 침공에는 후속대책만이 되풀이 되었다.
 
역대 군주들 중에도 [[가잔 칸]]만이 레바논, 시리아 지역에 여러차례 원정군을 파견하였으나, 대부분 군의 규모도 많아야 3만전후에 불과해 알레포 이남지역에 대한 정복엔 실패하였다. 쿠빌라이와 아리쿠브케의 제위계승분쟁 후에도 몽골제국 자체, 왕가간의 분쟁이 장기화가 계속되어 제국전체에 의한 군사행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도, 몽골측에 있어 레바논, 시리아에 있던 잃어버린 영토 탈환의 기회가 상실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