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터 B. 피어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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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 ==
[[1958년]] 당수 경선에서 [[폴 마틴]]을 누르고 당수에 당선되었다. 그 후 [[1963년]] [[4월 22일]] 총선에서 캐나다 14대 총리에 취임했다. 캐나다와 미국,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빠른 일을 하였다. 1964년 1월에는 캐나다 총리로는 처음으로 [[프랑스]]를 공식 방문했다. 또 1965년 1월에는 미국-캐나다 자동차 협정을 체결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 때, 미국으로부터 [[원자력]] [[탄두]]를 받는 데 동의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관련된 이유로 [[린든 B. 존슨]] 정부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다. 피어슨 총리는 미국의 베트남 파병 요청을 거절했다. 피어슨 총리는 방미 기간인 1965년 4월 2일 미국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에서 미국의 통킹만 폭격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강연을 했다. 격분한 존슨 대통령은 다음날 피어슨 총리를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서 “남의 1시간 동안거실에 천장에와서 매다는오줌을 폭력을싸면 휘둘렀다어떻게 하느냐”며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양복 깃을 움켜쥔 채 피어슨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는 또한 국내 사정에 심각한 문제를 향하였다. [[영어]]와 [[프랑스어]] 사용자들 사이의 논쟁들이 국가적 조화를 위협하였다. 많은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자기들이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불평을 하였다. 그래서 [[퀘벡 주]]의 분리 독립운동까지 일으키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캐나다의 경제에 [[붐]]이 일어나 피어슨 정부가 [[사회복지]] 사업을 공급하는 데 허락되었다. [[1968년]] [[4월 21일]]에 총리직을 사임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세계은행 그룹]]의 총장이 되었다. [[1972년]] [[12월 27일]] [[오타와]]의 외곽 록클리프 파크(Rockcliff Park)에 있는 자택에서 [[암]]으로 사망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