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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사성'''(孟思誠, [[1360년]] [[음력 7월 17일]] ~ [[1438년]] [[음력 10월 4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본관은 신창이다[[신창 맹씨|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고려 수문전제학 희도맹희도(希道)의 아들이며 [[고려]]말의고려말의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였다사위이다. [[황희]], [[윤회 (조선)|윤회]], [[권진]]과 함께 [[세종]]대의 재상이자대에 재상을 지냈으며 세종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다.
 
== 생애 ==
=== 생애 초반 ===
맹사성은 [[충청남도]] [[아산시|아산]] 온양 출신으로 고려 수문전제학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며 명장인 [[최영]]의 손녀 사위였다. 맹사성은 모친을 여읜 뒤 어린 나이에 3년간 시묘를 하여 훗날 그의 이야기가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수록됐다. [[1386년]]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춘추관검열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1392년]]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자 관직을 사퇴하였으나, 조정에 출사하여 후배들을 지도하라는 동료들의 권고로 [[조선]]에 출사한다출사했다. 그는 자신의 처조부인맹사성은 [[최영]]의 손녀 사위였는데 처조부인 최영을 본받아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또한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 본 [[이성계]]는 그가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임에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
 
[[1392년]] 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에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다.
 
=== 정치 활동 ===
[[1408년1392년]] 맹사성은조선 개국 직후 태조로부터 예의좌랑직을 제수받았다. [[1408년]]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역모 사건을 취조하는 중에 [[조선 태종|태종]]에게는 보고도 하지 않고 부마인태종의 부마이자 [[조준]]의 아들인 [[조대림]]을 고문했다.<ref name="park74">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74페이지</ref> 이 사건으로 맹사성은 왕과 왕족을 능멸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 직전까지 가게 된다.되었으나 당시 [[영의정]]이던 [[성석린]]과 [[황희]]의 도움으로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ref name="park74"/>
 
1417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고 [[1418년]] [[조선 세종|세종]] 즉위 후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거쳐 의정부찬성사를 지냈다. [[세종]] 13년에 좌의정이 되어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청백한 선비로도 유명한 일화를 많이 남겼다. [[황희]]와황희와 함께 [[조선]] 초기 문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시문에 능하고 음률에도 밝아 [[향악]]을 정리하기도 했다. '태종 실록'《태종실록》 편찬을 감독했고, '팔도지리지'를 편찬하였다. <ref name="글로벌 서울 맹사성"> 《[[글로벌 세계대백과]]》〈[[: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한국지리/중부지방-남부지방/서울특별시/서울의 사회·문화#맹사성|맹사성]]〉</ref>또한 맹사성은 검소한 관리, 효자로 표창받아 정문이 세워졌으며 직접 쓴 작품에 유명한 [[강호사시가]]가 있다 .
 
[[조선 세종|세종대왕]]이세종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귀의하자 [[성리학]]자이기도 한 그는 [[조선]]이조선이 [[유교]]국가임을 주장하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조선 세종|세종대왕]]이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설치하고 [[조선 태종|태종]] 때 억울한 사람들의 명복을 빌어준다고 하자, 그는 세종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히려 직접이번에는 [[집현전]] 학사들 일일이 찾아다니며 불교 귀의를 반대하였다.
 
그는 평소 하인이나 노비에는 관대했으나 중요 직책의 사람들에게는 엄하게 대하였으며 {{모호|자식에 절하기로 술버릇 가르쳤다.}} 또한 [[김종서 (1383년)|김종서]]의 장수로서의 재질을 알아본 그는 [[김종서]]의김종서의 사소한 잘못도 엄격하게 혼냈다. 그 뒤 김종서를 병조판서로 천거한 뒤 자신의 후임자로 추천하기도 했다.
 
===예악의 정비===
조선시대 유교정치에 있어서 [[예악]], 즉 예의와 음악은 가장 중심적인 부분이었다. 공자는[[공자]]는 자신의 삶을 도덕에 근거하고 인애에 의지하며 예술 경계에서 노니는 것이라고 했다. 예악은 유교적 삶이 추구하는 최고의 경계였다. 그러기에 법치보다는 예치를 추구했는데, 이것은 아름다운 정치를 지향한 것이었다.
 
세종 때 예악의 정비가 우의정 맹사성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박연을[[박연 (조선 초기)|박연]]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선조들로부터 이어져 온 고유의 전통 음악을 버리고 중국 음악 중심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맹사성은 전통 음악과 중국 음악을 조화하고 융합하는 방향에서 음악을 정비했다.
 
===여진 정벌===
세종 시대에는 압록강과[[압록강]]과 두만강을[[두만강]]을 경계로 한 북방 영토가 확정됐다. 당시 관료들은 북방의 여진족에[[여진족]]에 대해 정벌보다는 현상 유지를 주장했다. 그러나 세종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필요에 따라 여진족에 대한 회유와 정복을 병행하면서 주도면밀한 전략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옛 땅을 회복했다.
 
세종은 1433년 1만 5천명의 병력으로 파저강 유역의 여진족에 대한 정벌에 나섰다. 적 사망 170명, 포로 36명, 우마 170마리를 얻었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부상자 20명에 불과한 대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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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온천===
세종은 격무로 인해 잦은 질병으로 고통을 겪어 온양으로 내려와 온천욕으로 질병을 치료했다. 이 기념으로 ‘온양’이라는'온양'이라는 지명을 하사했다. 그런데 세종은 온천 치료의 혜택이 백성에게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 백성을 위한 온천탕을 만들고 백성들이 장기간 머물면서 치료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세종의 뜻에 대해 맹사성은 즉시 찬성하여 시행되도록 했다. 온양에 살았던 맹사성은 온천치료의 효험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맹사성은 세종이 조선의 온천 복지 정책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ref>{{뉴스 인용|제목=고불 맹사성이 민족사에 남긴 세 가지 업적|url=http://ionyang.com/default/index_view_page.php?part_idx=146&idx=24128|출판사=온양신문|저자=김기승 교수|작성일자=2011-04-22|확인일자=2011-04-2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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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관계 ==
* 아버지부 : 맹희도
* 어머니모 : 홍씨
** 부인처 : 철원 최씨
*** 아들 : 맹귀미
* 처조부 : [[최영]]
 
== 관련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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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ref name="park75"/>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ref name="park75"/>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ref name="park75"/>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다.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분장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 기타 ==
그의 재능을 특별히 눈여겨본 [[이성계]]는 그가 자신의 정적 [[최영]]의 손녀 사위임에도 연좌시키지 않고 중용하였다.
 
== 관련 항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