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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혁 ==
함북 화대에서 태어나 일본중앙대학을 다니면서 가라데를 배운 최홍희는 군에서 복무하며 군대격투기로 공수도를 지도하였다.
오도관(吾道館) 관장이었던 최홍희(崔泓熙)는 한반도에서 택견, 일본에서 공수도(松濤館空手道)를 수련하였다고 한다. 그가 군에서 복무하며 군대격투기로 공수도를 지도 하였고 1950년 대한공수도협회(大韓空手道協會)가 창립되었다.
최홍희는그가 여러 격투기를 혼합하여 독자적인 무술을 만들고자 하였으며 그만들고자한 결과 공수도에 비해 발차기가 유연해지고유연하며 체중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무도인 태권도가 만들어 졌다. 당수도·공수도 등 태권도를 지칭하는 명칭이 제각각이자 1954년 명칭제정위원회(名稱制定委員會)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택견과 비슷하다”라는 발언을 따라 민속적인 “택견”의 어감을 포함하는 “태권도(Taekwondo)”를 채택했는 설이 있으나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증거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다.
 
최홍희는 여러 격투기를 혼합하여 독자적인 무술을 만들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공수도에 비해 발차기가 유연해지고 체중이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무도인 태권도가 만들어 졌다. 당수도·공수도 등 태권도를 지칭하는 명칭이 제각각이자 1954년 명칭제정위원회(名稱制定委員會)가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의 “택견과 비슷하다”라는 발언을 따라 민속적인 “택견”의 어감을 포함하는 “태권도(Taekwondo)”를 채택했는 설이 있으나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며 증거자료가 남아 있지는 않다.
[[1959년]] [[대한 태권도 협회]](大韓跆拳道協會)의 창립과 함께 태권도 기술이 체계화되면서 현대 태권도가 등장하였다. 군인이었던 최홍희가 예편하고 ,[[1961년]] 초대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고 있던 시기에 대한태권도협회는‘대한태수도(跆手道)협회’로 개칭되었다. (WTF는 그 시점부터 연혁을 공인하고 있다.)
 
[[1965년]] 귀국한 최홍희는 다시 ‘대한태권도협회’로 개칭하고 회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 대한태권도협회를 중심으로 국제태권도연맹(ITF)를 설하였다설립하였다. [[1971년]]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국기태권도'라는 휘호를 받았으며받고,[[1973년]] 국기원(國技院)이 완성되었다건립되며 태권도는 우리나라 고유의 무도로써 자리를 잡아갔으며, 사범 개인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해외진출이 국가와 연맹의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1973년 최홍희가 캐나다로 망명하여 ITF 본거지를 토론토로 옮기자 대한태권도협회는(KTF) 독자로 세계태권도연맹(WTF)를 창립하였다. 이후 ITF는 초장기와는 달리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에 태권도를 중심적으로 보급하면서 친북세력으로 치부되어 최홍희는 국내에 입국하지 못한 채 2002년 숨을 거둔다. 반면 WTF는 국가의 전폭적 지지와 스포츠 외교의 달인이었던 김운용에 힘입어 [[1988년]] [[1988년 하계 올림픽|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고,[[2000년]] [[2000년 하계 올림픽|시드니 올림픽]] 때부터 정식 메달종목으로 채택되었다.
2007년 현재 WTF에는 185개국이 회원으로 가입되어있으며 약 680여만명의 유단자가 배출되었으며(국기원),ITF에는 2007년 현재 102개국이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