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나라 (춘추시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010203aaa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출처 필요}}
'''진'''(晉, [[기원전 1042년]] ~ [[기원전 376년]]은 [[주나라]] 무왕의[[서주 무왕|무왕]]의 둘째 아들 당숙[[당 숙우]](唐叔) 우(虞)가 형인 성왕에게[[서주 성왕|성왕]]에게 삼감의 난이 평정된 이후 그 땅을 봉받아 세운 나라이다. [[진 문공|문공]](文公)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문공 사후 경대부의 세력이 강해지고 결국 경공(頃公) 때 실정(失政)하여 권력이 경대부에게 넘어갔고 마침내 정공(靜公) 때 경대부의 후예가 세운 삼진(三晉)에게 멸망 당했다.
 
== 역사 ==
=== 서주 시대 ==
[[당 숙우|숙우]]가 봉건될 때에는 나라 이름을 '당'(唐)이라 했으나, 숙우의 아들인 [[진후 섭]]은 진후(晉侯)를 일컬었다. 이를 통해 진나라는 처음에 당에 봉해졌으나 진(晉)으로 천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과 진의 위치는 오랜 세월 논쟁거리였으나, 천마 곡촌 유적이 발굴되고 이곳에서 2대 진후인 섭보부터 10대 진후 [[상숙]] 혹은 11대 진후 [[진 문후|문후]]의 묘지가 확인됨으로써 논쟁에 일단락을 지었다. 곧 섭보가 천도한 진(晉)은 이 천마 · 곡촌 유적지 부근이며, 이후 춘추 초기까지 이 지역이 진나라의 중심지로 자리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ref name="hd">김정열: 《橫北村과 大河口 : 최근 조사된 유적을 통해 본 西周時代 지역 정치체의 양상》, 동양사학회 학술대회 발표논문집, 동양사학회, 2012. 6. 31 ~ 44</ref>
 
=== 진과 곡옥의 내분===
[[진 문후|문후]] 사후 세자 백(伯, [[진 소후|소후]])이 그 뒤를 이었으나 숙부 [[곡옥 환숙|환숙]]의 강력한 세력을 두려워해 곡옥(曲沃) 땅에 환숙을 봉해 곡옥백(曲沃伯)이라 부르게 하였다. 그런데 곡옥은 진나라의 수도 익(翼) 보다 넓어 여전히 환숙이 더 강했다. 진 소후 사후 진과 곡옥은 치열한 세력 경쟁을 벌였으나, 곡옥의 세력이 진나라에 비해 강성하여 곡옥백이 여러 차례 진나라를 쳐 임금들을 죽이거나 쫓아냈다. 익의 백성들은 곡옥백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고 임금이 죽을때마다 새 임금을 세우고 곡옥백을 쫓아냈기 때문에 싸움은 길어졌으나, 결국 [[진 무공|곡옥 무공]]이 진 문후 계통의 마지막 임금인 [[진후 민]]을 죽이면서 끝나고 다시 하나로 통합되었다.
 
== 진의 팽창 ==
천마 · 곡촌 유적지에서 남동쪽으로 20 km 떨어진 횡북촌 유적에서는 붕백(倗伯)이 다스리는 붕읍(倗邑), 천마 · 곡촌 유적지에서 동쪽으로 18 km 떨어진 대하구 유적에서는 패백(覇伯)이 다스리는 패읍(覇邑)의 존재가 드러난다. 그런데 두 유적지 모두 춘추 초기 무렵을 끝으로 멸절되었으며, 이를 통해 춘추시대 초기 진나라의 확장정책에 따라 붕나라와 패나라가 진나라에 병탄된 것을 짐작할 수 있다.<ref name="hd"/>
=== 삼진 분립 ===
문공(文公) 때부터 실정(失政)하기 전까지 계속 천하의 패권을 놓고 초나라와 겨루었다. 또한 임금이 경들을 중용하여 나라를 다스리면서 점차 경들의 세력이 진나라에서 강해졌다.
줄 117 ⟶ 122:
| 38 || [[진 정공|정공]](靜公) || 구주(俱酒) || 8년 || 기원전 356년 || 기원전 349년
|}
== 주석 ==
 
<References/>
{{중국 춘추 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