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빅투아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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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동안, 친애왕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 사이의 자식은 빅투아르와 [[프랑스 공주 마리 아델라이드|아델라이드]](Adélaïde de France)공주만 생존해 있었다. 두 공주는 반기독교적 혁명에 반명에 반대하였고 [[1791년]] 2월 모욕들을 겪으며 [[프랑스]]를 떠났다.
 
그녀들은 [[이탈리아]]로 망명했다. 먼저 [[피에몬테 주|삐에몽]]의 왕과 결혼한 그녀들의 조카 [[프랑스의 마리아 클로틸데|클로틸드]](Clotilde)가 살고있는 [[토리노]], 그리고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보호되는 [[로마]]로 갔고, 교황은 그녀들을 파르네즈궁(palais Farnèse)에서 살게 하였다.
 
[[프랑스]] 군대가 도착했을 때, 그녀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매였던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카롤리나]]<ref>그녀는 나폴리의 왕비(Queen Consort)였지만, 자식에게 쫒겨나기 이전까진 사실상 나폴리의 여왕(Queen)으로 군림하였다.</ref>가 다스리고 있는 [[나폴리]]로 갔지만 그녀는 빅투아르와 그의 자매를 보기를 별로 원치 않았다. 두 노년의 자매는 [[1798년]] 다시 [[아드리아 해]]를 건너며 도망을 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