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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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치 전투 ===
{{본문|우금치 전투}}
1894년 음력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미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 (관료)|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노성군|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12월 23일]]([[음력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하였다.
 
[[파일:1894년 전봉준 압송 사진.jpg|thumb|160px|right|[[1894년]] [[12월]]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되는 전봉준 (교자에 포박되어 앉아있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