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안 핵리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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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세조 완얀 호피포'''(完顔劾里鉢, 완얀 호리포(헤리보, 핵리발)[[1039년]] ~ [[1092년]])은 [[오고내|완안 오고내]]의 차남이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 같이 [[요나라]]에 의해 임명된 완안부의 태사(재위:[[1074년]]—[[1092년]])였다. 헬리보는 완안부 주위의 강력한 군사지도자였다.
{{출처 필요|날짜=2013-09-24}}
<br>(이름 발음 : 만주어 - 호리포, 사성음 - 헤리보, 한국음 - 핵리발, 해리발)
'''금세조 완안 핵리발'''(完顔劾里鉢, 완얀 호리포(헤리보, 핵리발)[[1039년]] ~ [[1092년]])은 [[오고내|완안 오고내]]의 차남이다.
그는 아버지 오고내가 요나라 도종에 의해 절도사에 임명된후, 이를 이어 절도사로 임명 되었다. 여진에서는 절도사를 태사(재위:[[1074년]]—[[1092년]])라 불렀다.
핵리발은 습위 초기에 내외의 반란에 시달리고, 남북으로 강력한 외부 부족들에게 포위 되었으나 열세를 극복해 환난, 산달, 오춘, 와모한 등을 토벌하였다.
(이름 발음 : 만주어 - 호리포, 사성음 - 헤리보, 한국음 - 핵리발, 해리발)
 
그는 [[금 희종]]에 의해 1136년에 성숙황제(聖肅皇帝)로 추시(追諡)되었고,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1142년에 그 묘를 이르러 영릉(永陵)이라 불렀다.
1143년에 세조신무성숙황제(世祖神武聖肅皇帝)로 증시(增諡)하였다.
 
 
== 생애 ==
 
(경조 오고내烏古乃의) 둘째 아들이 절도사(節度使)를 이어 받았으니, 이가 곧 세조(世祖)이며, 휘(諱)는 핵리발(劾里缽)이다.
생여진(生女直)의 풍속에, 아들이 태어나 장년이 되면 곧 다른 곳에 거주한다.
경조(景祖)의 아홉 아들은, 본처(元配) 당괄씨(唐括氏) 소생의 핵자(劾者), 다음이 세조(世祖), 다음이 핵손(劾孫), 다음이 숙종(肅宗), 다음이 목종(穆宗)이다.
이내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며, 경조가 말하길
「핵자는 유화(柔和/부드럽고 온화)하니, 가히 가무(家務/집안일)을 다스릴만 하다.
핵리발은 기량(器量/재능과 덕량)과 지식(智識)이 있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것이 있겠는가
핵손은 또한 유선인(柔善人/부드럽고 착한 사람)이라 듣고 있다.」
이에 명을 내려 핵자를 세조와 함께 같이 살도록 하고, 핵손은 숙종과 함께 살았다.
경조가 졸(卒)하자, 세조가 이어 받았다. 세조가 졸하자, 숙종이 이어 받았다. 숙종이 졸하니 목종이 이어 받았다.
목종은 다시 세조의 아들에게 전하여, 태조에게 이르렀으니, 마침내 대위(大位/황위)에 오르게 되었다.
 
세조는, 요(遼) 중희(重熙/흥종興宗의 연호) 8년(1039년) 기묘년(己卯年) 생이다.
요 함옹(鹹雍/도종道宗의 연호) 10년 (1074년), 절도사(節度使)를 이어 받았다.
 
경조의 배다른 동생 발흑(跋黑)이 이지(異志/배반하려는 마음)가 있자, 세조가 만약의 사태에 근심하고,
가의(加意/특별히 주의하다)하니, 장병을 보내지 않고, 단지 부족장만을 하게 하였다.
 
발흑이 드디어 환난(桓赧), 산달(散達), 오춘(烏春), 와모한(窩謀罕)을 꾀어내어 난을 일으키자,
각 부족사이에 세조를 배신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세조는 오히려 무위(撫慰/어루만지고 위로함)하니, 발흑전(跋黑傳)과 환난전(桓赧傳) 등에 그말이 있다.
세조가 가고부(加古部) 단공(鍛工/대장장이) 오불둔(烏不屯)에게 피갑(被甲/갑옷) 90벌을 사들였는데,
오춘이 장차 병단(兵端/전쟁의 구실)을 삼기 위해 맡긴 것인바, 세조가 그 갑옷을 돌려 보내니, 《오춘전(烏春傳)》에 그 말이 있다.
 
부중(部中/부족내)에 유언이 떠 돌았는데, 그말은
「장차 발흑에게 붙는자는 살것이요, 핵리발과 파자숙(頗剌淑)에게 붙는자는 죽을것이다 」
이니 세조가 듣고, 의심하였다.
자세히 살필수가 없자, 이내 거짓으로 흉내내어 꾸미어, 배신할 자가 있는지 알아 보고자,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양언(揚言/소리높혀 말함)하길,
「구지(寇至/도둑놈)다!」
이 소리를 들은 부족무리들은 허실(虛實)을 몰라, 어떤자는 발흑의 가족을 지켜주거나, 어떤자는 세조의 가족을 지켜주니,
세조가 이내 형제부속(兄弟部屬/형제들이 거느린 무리)의 향배(向背/순종과 배반)를 다 조사하여 실상을 모두 알게 되었다.
 
수년간, 오춘이 공격해 오자, 세조가 막았다.
때는 10월 중순이었는데, 큰비가 밤낮으로 오자, 얼음이 땅을 뒤 덮어, 오춘이 다가 올수 없었다. 분하게 여기며 말하길
「하늘의 뜻이다!」
하며, 이내 병을 철수하여 가버렸다.
오춘은 아리왜촌(阿里矮村)의 재불내(滓不乃)의 집에 숙박하였는데, 군사로서 동생 승곤(勝昆)이 사는 호불촌(胡不村)을 에워 쌓았다.
군사가 퇴각하자, 승곤이 형 재불내를 잡아, 세조에게 죽일것을 청하고, 또한 그 노육(孥戮/노예나 죽임)을 면하길 청하였다. 이에 따랐다.
 
환난과 산달이 또 거병(舉兵)하자, 숙종을 보내어 막게하였다.
당시에 오춘의 병은 북쪽에 있었는데, 환난은 남쪽에 있었으니, 기세(其勢)가 심히 성하였다. 경계하여 말하길
「화친하는게 좋으니, 결전(決戰)은 안된다!」
하였으나, 숙종의 병이 패하였다.
오춘이 장마가 오자 해거(解去/병을 풀고 돌아감)하니,
세조가 이내 편사(偏師/일부병력)를 이끌고 사흔수(舍很水)를 건너, 첩할수(貼割水)를 지나, 환난과 산달의 집을 노렸다.
다음날, 짙은 안개(대무大霧)에 매우 어둡자(회명晦冥), 길을 잃었는데, 파다토수(婆多吐水)에 이른걸 깨달았다.
즉시 사흔과 첩할사이를 되돌아 와, 고부(高阜/높은 언덕)에 올라 바라다 보니, 6기가 오는 것이 보여, 크게 소리치며, 질주하여 공격하였다.
세조가 한사람을 쏘아 죽이고, 5인은 생포하여, 물어보니,
이내 복회(蔔灰)과 살골(撒骨)에게 도움을 청하는 환난과 산달쪽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세조가 환난과 산달의 거주지에 이르자, 그집을 분탕(焚蕩/집안의 재산을 모두 없애버림)하였다.
백여인을 죽였으며, 구장(舊將) 주보(主保) 역시 죽였다. 세조가 돌아와, 숙종과 회합하여, 숙종의 병사가 또 패한것을 알았다.
세조가 숙종이 실패한 것을 꾸짖었다.
화의(의화議和) 사자를 보내자, 환난과 산달이 말하길
「영가(盈歌)의 대적마(大赤馬/붉은큰말)와, 사불실(辭不失)의 자류마(紫騮馬/밤색말)를 나에게
보낸다면, 나는 곧 화의하겠다」
두말은 모두 여진의 명마니, 불허하였다.
환난과 산달이 다수의 각 부족과 함께 공격해 올때, 배만부(裴滿部)를 지나다가, 세조에게 붙었다 하여, 불사르게 하였다.
포찰부(蒲察部)의 사기(沙祇) 발근(勃堇/여진족 관명)과, 호보답(胡補答) 발근(勃堇)이 아희(阿喜)를 보내 통고하니,
세조가 그들을 시켜 거짓으로 따라 스스로를 보전하게 하고 말하길,
「전투에서는 기고(旗鼓/군기와 북)로 서로를 구별한다.」
 
세조가 환난의 무리를 방어하기 위해, 장차 가려고 하는데 보고자가 있어 하는말이
「발흑이 애첩(愛妾)의 아버지 집에서 식사하다가, 고기가 목에 막혀 죽었습니다!」
곧 숙종을 보내 요(遼)에 구원(求援)을 요청하니, 드디어 무리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해고형제(海姑兄弟)의 병력을 취(取)하고자 사불실(辭不失)을 보내니, 이내 해고형제가 환난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그무리를 취하고자, 해고의 지름길로 갔다. 정탐하는 자가 보고하길
「적이 왔다.」
고 하였다. 장차 전투에 이르자, 세조가 사불실에게 경계하며 말하길
「너의 선봉대가 탈활개원(脫豁改原)에 이르고, 내가 깃발을 세번 높히 올리고, 세번 북을 치면,
즉시 결전에 돌입해라. 죽고 사는것이 오직 오늘에 있으니, 목숨을 아끼지 마라!」
배만(裴滿) 부족의 호희(胡喜)로 하여금 대자류마 두마리를 끌게하고, 급히 진(陣)으로 질주해갔다.
이때 환난과 산달의 세력이 강성하니, 세조의 군사들이 두려워 싸우려 하지 않고, 모두 공포에 질려 안색이 변해 있었다.
세조가 평상시와 다름없이 양양(陽陽/의젓)하고, 또 책양(責讓/꾸짖음)의 말이 없었으며,
단지 사졸로 하여금 갑옷을 풀고 쉬게 명하고, 물로 얼굴을 씻으며, 보리가루를 넣은 물을 만들어 마셨다.
잠시후에, 훈세(訓勵타일러 힘쓰게함)하니, 군세(軍勢)가 다시 떨치었다.
이내 무리를 피해 홀로 목종을 당기며, 그 손을 잡고 은밀히 말하기를
「오늘일은, 이기기가 힘드니, 만일 이기지 못하면, 나는 반드시 살지 못할 것이다.
너는 지금 개마(介馬)를 몰고 멀리가, 싸움에 참여하지 말하라.
내가 죽으면, 너는 내뼈를 거두지 말고, 친척(親戚)을 고련(顧戀/마음에 맺히어 잊지못함)하지 말고,
빨리 말을 달려 너의 형 파자숙(頗剌淑)에게 고하고, 요(遼)의 계적(系籍)의 인장을 받아,
군사를 빌어 원수를 갚아라!」
말을 마치자, 소매를 걷어 올리고, 갑옷도 입지 않고, 앞가슴과 등을 보호해주는 삼베옷을 벗어 버린후
활을 활집에 넣고 칼을 뽑아, 깃발을 세번 올리게 하고, 세번 북을 울린후,
기를 버리고 박전(搏戰/격한전쟁)하려, 몸소 선봉이 되어, 적진에 돌입하니, 무리가 뒤를 따랐다.
사불실이 따라와 분발하여 공격하니, 크게 부수었다. 승세를 몰아 적을 쫓으니, 북애전(北隘甸)에 이르기까지 굽히지 않아,
죽은자가 산처럼 쌓였고, 파다토수(破多吐水)의 물이 붉게 물들었고, 버린 수레,갑옷,말,소등의 군수물자를 모두 획득하였다.
세조가 말하길
「오늘의 승리는, 천명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또한 이로써 알게 되었다.
비록 저들이 도망갔으나, 패한군대의 기운으로는, 죽음을 떨치지 못할것이다.」
이내 적군을 보내 주었다. 세조가 그 전지를 보고, 치돌(馳突/갑자기 세차게 질주함)하여 대로를 만드니,
드넓기가 또한 30농(隴)이나 되었다. 친히 아홉사람을 죽여 서로 중첩해 쌓으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환난과 산달이 이때부터 세력을 회복하지 못해, 오래지 않아, 그무리를 이끌고 항복해 왔으니,
요(遼) 대안(大安/도종의 연호) 7년 (1091년) 이였다.
 
처음에, 환난 형제의 난 당시, 부술로부(不術魯部) 복희(卜灰)와 포찰부(蒲察部) 살골출(撒骨出)이 도왔다.
이때에 이르러, 부르니, 화친에 응하지 않았다. 복회의 무리 석로가 드디어 복회를 죽이고 항복해 왔다.
살골출이 도망하자 이를 추격해, 길옆에 숨어 있다가 화살을 쏘니, 명중하여 죽었다. 원래 부족으로 모두 돌려 보냈다.
 
경조때, 알륵부(斡勒部) 사람 배내(杯乃)가 복종하였는데, 그당시, 딴마음이 있었다.
그집이 화재로 소실되었을때, 원인은 무환부(誣歡部)가 불을 질렀기 때문인데, 세조가 약조대로 정벌하였다.
배내가 안심하지 못하고, 드디어 오춘과 와모한(窩謀罕)이 거병할때 합세하였다.
숙종을 보내 싸우게 하여, 깨트리고, 배내를 사로 잡아, 세조가 요에 바쳤다.
 
랍배(臘醅)와 마산(麻產)이 야거여진(野居女直)을 침략하여, 내유수(來流水)의 목마(牧馬)를 노략질하였다.
세조가 공격하던 중에, 네군데의 상처를 입어, 오랫동안 병을 고치었다.
랍배등이 다시 목종의 목마를 노략질하자, 각 부족과 연합하였다.
세조가 다시 정벌하니, 랍배등이 거짓으로 항복하고, 이내 돌아갔다.
랍배가 고리(姑里) 근방의 병력 117인을 획득하고, 수험(守險/험한곳)에 근거하였는데,
석현(石顯)의 아들 파제간(婆諸刊)이 또 그가운데 있었다.
세조가 군대로 이기자, 고리 근방의 병력을 모두 획득하였다. 이에 마산이 도망갔다.
드디어 랍배를 사로잡고, 파제간과 함께 요에 바쳤다.
이어, 재차 요청하자, 요나라 사람과 함께 와, 앞뒤로 나란히 하여 죄인의 처분을 위임하였다.
 
환도(歡都)가 사퇴(斜堆)에서 오춘등을 공격하여, 고석(故石)과 발석(拔石)을 모두 사로잡았다.
세조가 환도와 함께 영동(嶺東)에서 합병(合兵)하여 자신의 장수로 삼았으며, 이에 각 군이 모두 이르렀다.
이때는, 오춘이 죽기 전 이였는데, 와모한(窩謀罕)이 요(遼)에 요청하여, 화해(和解)를 원했다.
화친이 이루워지자, 다시 습격해 왔고, 이내 군을 진군하여 에워 쌓았다. 이에 와모한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 성을 파하고, 모두 사로잡자, 공의 위차에 의해 각군에 나눠 주었다.
성을 비로소 파하자, 우두머리의 죽이고 살리는 것을 의논하여, 무리가 길게 꿇어 앉으니, 요(遼) 사자(使者)가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한사람이 지척에서 큰칼을 들고 돌입하자, 세조에게 고하며 말하길
「나를 죽이지 마라!」
하니, 요사자의 좌우가 모두 달아났다.
세조는 미동도 하지 않고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으며, 그 사람을 손으로 잡으며, 하는말이
「나는 당신을 죽이지 않소」
하고 좌우에 도망간 사람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어찌 감히 도망 갈 수 있느냐?」
꾸짖고는, 이내 사자로 하여금 돌격한 자를 죽이게 하였다.
그 담용(其膽/담력과 용기)으로 진압하고 살피는게 이와 같았다.
군사를 이끌고 되돌아 오자, 병에 걸려, 드디어 위독해졌다.
첫부인인 나라씨(拏懶氏)가 곡(哭)을 그치지 아니하자, 세조가 말하길
「너는 곡하지 마라, 너는 내가 1년 뒤에 듣겠다」
숙종이 후사(後事)를 청하자, 말하길
「너는 내가 삼년 후에 생각해 보겠다」
숙종이 나가서, 사람을 불러 이르길
「내 형님이 다 되셨으니, 다시는 내게 좋은 말을 못하실것이다」
이내 땅을 두드리며 곡하였다.
갑자기 목종을 불러 이르길
「오아속(烏雅束)은 유선(柔善/부드럽고 착함)하니, 거란(契丹)과의 일이 힘들것이나,
아골타(阿骨打)는 능히 할수 있을것이다」
요(遼) 대안(大安/도종 연호) 8년 (1092년) 5월 15일 졸(卒)하였다.
 
습위(襲位/위를 이어받음)한지 19년이요, 수는 54세 였다. 다음해, 나라씨(拏懶氏)가 졸(卒)하였다.
또 다음해에, 숙종(肅宗)이 졸(卒)하였다.
숙종의 병이 위독해지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 형님이 진실로 지혜가 많구나!」
세조는 천성이 엄중(嚴重)하고, 지식(智識)이 있었으며, 한번 본것은 반드시 알았고, 잠깐 들은것도 잊지 않았다.
응한(凝寒/냉병)에도 움추리지 않았고, 몸을 돌보지 않고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매번 싸울때마다 갑옷을 입지 않았으며, 몽조(夢兆/꿈자리점)로 승부를 살폈다.
술에 취해 나귀를 타고 집안으로 들어 왔는데, 다음날 당나귀의 발자국을 보고, 물어보아 이를 안후, 다시는 음주(飲酒)를 하지 않았다.
 
위를 이어 받았을 초기에, 내외가 배반하여 무너졌고, 도적들이 서로 연합하였다.
세조가 실패한 것을 바꾸어 성공 하였으며, 약세에서 강세로 변하였다.
이어서 환난, 산달, 오춘, 와모한를 깨트리고, 그일을 스스로 훌륭하다 여기였다.
천회(天會/금 태종 연호) 14년 [1136년], 성숙황제(聖肅皇帝)로 추시(追諡)되었고,
묘호(廟號)는 세조(世祖)이다. 황통(皇統/금 희종 연호) 4년 [1142년], 그 묘를 이르러 영릉(永陵)이라 불렀다.
황통 5 [1143년]년, 세조신무성숙황제(世祖神武聖肅皇帝)로 증시(增諡)하였다.
 
 
그는 [[금 희종]]에 의해 세조(世祖) 성숙황제(聖肅皇帝)로 추숭되었다. [[1144년]]에, 그는 영릉(永陵)에 이장되었다.
 
== 가족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