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대외 관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Arab club(토론)의 11140044판 편집을 되돌림, 역중립 훼손
97번째 줄: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ref>{{서적 인용 |저자=박복원 |제목=일본정보뱅크 |꺾쇠표= 예 |연도= 2004 |출판사=백산출판사 |위치=|id=ISBN 8977396271 |쪽= 136 |인용문 = 그러나 대륙에서는 신라와 당나라가 서로 대립하면서 양국은 각각 일본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려고 일본에 국교를 요청하였으며, 일본은 견당사(遣唐使)와 견신라사(遣新羅使)를 파견하였다. 사절과 유학생이 많았던 것은 당나라보다 가깝고 항해에 안전한 신라쪽이었다. }} </ref> 799년 일본은 신라사(新羅使)의 파견을 중단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03년 7월에 일본과 교빙하여 우호를 맺고<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 三國史記/卷10|본기 권10 애장왕]] |인용문=  哀莊王… 四年 … 秋七月 與日本國 交聘結好 (애장왕…4년(803) 가을 7월에 일본국과 서로 사신을 교환하여 예방하고 우호를 맺었다.) }}</ref> 다음 해 5월에 일본이 황금 300냥을 진상<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 三國史記/卷10|본기 권10 애장왕]] |인용문=  哀莊王… 五年 … 夏五月 日本國遣使 進黄金三百兩 (애장왕…5년(804) … 여름 5월에 일본국이 사신을 보내와 황금 300량을 바쳤다.) }}</ref>했으며, 882년 4월에도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헌상했다 <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zh: 三國史記/卷11|본기 권11 헌강왕]] |인용문=  憲康王… 八年 夏四月 日本國王遣使 進黃金三百兩 明珠一十箇 (헌강왕 8년(882) 여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ref>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일본이 신라에 사신 파견을 정지한 터에 황금을 바쳤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들다.(<- 일본 측 주장임. 출처 필요) 신라와 일본의 관계가 “9세기 이후 정상화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것은 아전인수라는 주장도 있다.<ref>{{서적 인용 |저자=김성호, 김상한 |제목= 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꺾쇠표= 예 |연도= 2008 |출판사=맑은소리 |위치=|id=ISBN 9788980502219|쪽= 262 |인용문 = 그 후 『일본후기』연력 18년(799) 5월 29일자로 일본은 “사신의 신라 파견을 정지했다(停遣新羅使).” 당시 일본은 발해와는 계속 왕래해도 대등외교를 표방하는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ref>
 
[[당나라|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헤이안 시대|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ref>{{서적 인용 |제목= 군함 이야기| 저자= [[허홍범]] |꺾쇠표 =예|판= |연도= 2006 |출판사=좋은책만들기 |쪽= 82 |id=ISBN 8989222931|인용문= 당과 교역을 하면서도 항상 견제를 하던 발해는 812년 당의 요구에 따라 신라가 발해원정에 참여하자 신라를 적대시하는 반면 신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일본과 동맹을 추구했다. 따라서 정세는 신라와 당, 발해와 일본의 이분구도를 이루게 되었다. 일본은 836년 견신라사 파견을 중단하고 838년에는 견당사 파견을 중단하여 발해와의 관계만을 유지했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