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 일본군과의 전투 ====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음력 10월 26일|26일]])까지 [[공주시|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 전봉준은 김개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김개남]]은 [[청주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 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강)|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시|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ref name="parkus451"/>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ref name="parkus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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