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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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과 실패 ===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보운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ref name="parkus261">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1페이지</ref>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농민적 사회경제의 기반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다.<ref name="parkus261"/>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에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ref name="parkus261"/>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ref name="parkus451"/>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ref name="parkus451"/>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ref name="parkus452">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52페이지</ref>
 
=== 체포와 최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