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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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날짜=[[1592년]] [[8월 15일]]([[음력 7월 9일]]) ~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장소=[[충청도]] [[금산군|금산]]
|결과=[[일본]]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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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군|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제일 먼저 나선 사람은 [[광주광역시|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학자 출신 [[고경명]]으로 막내 아들 [[고인후]]와 지금까지 모은 의병 7000명을 이끌고 [[금산군|금산]]을 탈환하기 위해 북상했다.
 
[[8월 7일]]([[음력 7월 1일]]) [[충청도]] 의병장 [[조헌]]에게 연락해 [[금산군|금산]]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이곳을 지키는 일본군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는 [[권율]]과의 [[이치 전투]]를 한창 벌이고 있었는데 [[고경명]]의 의병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를 중지하고 [[금산군|금산성]]을 지키기 위해 달려갔다.
 
[[고경명]]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과도 합류해 [[금산군|금산성]]을 공격했고 왜군은 [[조총]]으로 대항했다. [[고경명]]은 주위에 불을 지르고 [[비격진천뢰]]와 30명의 특공조까지 편성해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