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찬위: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한명회 초상화가 아니라 조선 중기 무신 원천군 변수(1447∼1524)의 초상화이므로 삭제하였습니다. 문화재청 링크(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1180000,32)
잔글편집 요약 없음
36번째 줄:
 
[[파일:Stale of Gumseong Daegun.jpg|thumb|[[금성단]] 안에 있는 금성대군성인신단지비(錦城大君成仁神壇之碑)]]
그 후 9월에 [[금성대군]]은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여 영남 인사에게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밀고가 들어가 탄로 나서 금성대군은 안동에 하옥되고, 이보흠과 기타 영남의 인사들도 많이 주살(誅殺)되었다. 한편, 세종의 아들 [[한남군]](漢南君)·[[영풍군 (사람왕족)|영풍군]](永豊君) 등도 멀리 귀양 가고 노산군에 대하여는 군(君)을 폐하여 서인으로 하였다. 이에 영의정 정인지·좌의정 [[정창손]]·이조판서 [[한명회]]·좌찬성 [[신숙주]] 등은 계속 노산군(단종)과 금성대군을 치죄할 것을 주장하여, 세조는 마침내 금성대군을 사사(賜死)하고 불과 이때 나이 17세였던 단종도 죽였다.
 
== 영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