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만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편집 요약 없음
12번째 줄:
《삼국사기》권25 백제본기(百濟本紀)3의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조에는 목협만치(木劦滿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데, 백제의 수도 [[위례성]](尉禮城)으로 쳐들어온 고구려군의 공격 앞에서 개로왕이 죽음 직전에 피신시킨 왕자 [[문주왕|문주]](文周)를 호종하여 남쪽으로 갔던 인물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꺾쇠표 =예|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25/개로왕|본기 권25 개로왕]] |인용문= 二十一年... 文周乃與木劦滿致·祖彌桀取 木劦·祖彌皆複姓 隋書以木劦爲二姓 未知孰是 南行焉 (21년(475년)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劦)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ref>
 
[[1971년]] 일본의 사학자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에 의해 처음으로 [[소가 가문|소가 씨]](蘇我氏)의 시조인 소가노 마치(蘇我滿智)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보는 주장이 등장하고, 나아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와 「목협만치」를 동일인물로 추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는데<ref>門脇禎二「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12号、1971年), 『「大化改新」史論』(思文閣出版、1991年), 鈴木靖民「木満致と蘇我氏」(『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51号, 1981年), 山尾幸久 『日本国家の形成』(岩波新書, 1977年). </ref><ref>{{서적 인용 |저자=KBS역사스페셜 |제목=역사스페셜3 |꺾쇠표= 예 |연도= 2001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558 |쪽= 84 |인용문 = 그러나 목협만치에 대한 기록은 웅진 천도 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목협만치와 성만 다를 뿐 이름이 똑같은 소가노 만치가 이후 일본 역사서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로든 일본 열도로 건너간 목협만치가 그곳에서 기반을 잡은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 </ref><ref>{{서적 인용 |저자=홍윤기 |제목=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꺾쇠표= 예 |연도= 2000 |출판사=효형출판 |위치=|id=ISBN 8986361329 |쪽= 74~75 |인용문 = 소가노 우마코의 고조부는 백제 개로왕 때의 대신인 목만치(木滿致)다. 목만치 대신은 개로왕이 한성으로 남침해온 고구려 장수왕의 군사들에게 살해당하자 개로왕의 왕자인 문주왕(文周王, 재위 475~477)을 등극시킨 뒤 왜나라로 건너가 왜나라 조정의 조신이 된 인물이다. 목만치는 백제 왕족들이 살던 백제강 일대의 이시카와〔石川〕에 자리잡고 성씨를 '소가'로 바꾸었다고 가도와키 테이지는 밝히고 있다(門脇禎二, 『飛鳥』, 日本放送出版協會. 1995). }} </ref>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제기된다. 「목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일본서기》오진키(應神紀) 25년은 서기로는 414년에 해당하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으로 서기로는 475년에 해당하여, 양자간에 시대가 맞지 않는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369년,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로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의 군사들이)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는 기록을 싣고 있는데 목만치가 태어났다는 「討新羅時」라는 사건의 시점은 바로 여기이며, 369년에 태어난 목만치가 475년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양자간에 백여 년에 가까운 차이가 있다.<ref>목라근자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의 기사를 120년이 아닌 180년을 인하하여 목라근자가 비유왕 때에 활약한 장군으로 보았던 야마오 유키히사의 지적도 있지만(山尾幸久『古代の日韓關係』1989, p.123~127) 목만치 한 사람의 나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목라근자의 활동 기사만 180년을 끌어내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반론이 제기된다(노중국, 위의 책, p.172).</ref> 때문에 목만치와 목협만치는 동일인물이 아니라 동명이인으로 파악되곤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와 《일본서기》의 목만치의 활동 시기가 서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목만치의 탄생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해석에서 시작되는데,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討新羅時」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삼국사기》에 따르면 목라근자가 활약할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의 1년전, 3년전에 해당하는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일본서기》는 기록의 특성상 해외, 특히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을 대부분 「신라를 정벌하였다(쳤다)」는 식으로 기술되어 있곤 하다.</ref> 더욱이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新羅本紀)3의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하자 근초고왕이 그들을 송환해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면서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임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 대목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서 366년과 368년에 맺어졌다는 백제와 신라 양국간 화친은 373년까지 깨어지지 않고 이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무턱대고 어느 한쪽의 기록만을 따를 수는 없는 것이다.<ref>이희진은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신라본기」, 와 《일본서기》「신공기」의 관련 기록을 비교해보면 가야 지역 평정과 관련해 364년을 전후해 신라와 왜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점이 일치하는 반면에 《삼국사기》는 「364년 왜의 침공(신라측의 승리)→366년 백제와의 화친→368년 백제와의 화친」의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는 점, 《일본서기》는 「369년 신라 침공(왜의 승리)+가야 지역 평정」으로 신라와의 전쟁과 가야 지역에서의 군사행동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점이 다르며, 《삼국사기》에 기술된 백제와 신라 양국의 화친과 《일본서기》의 신라 격파는 서로 상치되는 것으로서 이런 경우 《일본서기》보다는 《삼국사기》의 기술이 더 정확하다는 전제하에, 「신라와 왜의 전쟁」과 「가야 지역 평정」은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고 왜의 입장에서는 「신라를 물리치고 겸해서 가야를 평정했다」는 《일본서기》「신공기」의 기록과는 달리 「신라를 공격했지만 별다른 타격을 입히지 못하다가 백제의 협조를 받아서 가야 지역을 평정했다」는 것이 되어 대단한 원정의 기록으로 어필되기 어렵게 되므로, 천황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일본서기》 편찬방침상 대신라 전쟁(364년)과 가야 지역 평정(369년)이라는 두 가지 별개의 사실을 369년이라는 하나의 시점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몰아 기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이희진, 『가야정치사연구』1998년, 학연문화사, p.60~62).</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