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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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대패 ==
 
한편 신라의 군대는 [[7월 9일]]([[음력 5월 26일]]) 출발하여, [[7월 30일]]([[음력 6월 18일]]) 지금의 [[이천시|이천 지역]]인 남천정에 모였다. 신라군은 이곳에 대기한 뒤, [[8월 2일]]([[음력 6월 21일]]) 덕적도(德積島)에서 신라의 태자 [[김법민]]은 신라 제1군 5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 군을 맞이한다. 이때 두 나라 군대는 [[8월 21일]]([[음력 7월 10일]]) 백제 사비성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제2군 5만 명은 이천에서 남하한 뒤 탄현을 넘어 진격했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의 신라 제3군 10만 명의 주력군이 금성을 출발해 [[백화산]]에 진을 쳤다. 그리고 기타 4만 명의 병력 등 총 37만 대군이 백제를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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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만 해도 백제는 두 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해 방어 준비를 하지 않는 결정적인 패착을 저지른다. 뒤늦게서야 두 나라의 공격 목표가 백제임을 알게 되었고, 뒤늦게 방비를 서두른다. 의자왕은 좌평 의직에게 2만 명의 결사대를 내주어 백강을 막게 하고 계백 등에게 결사대를 내주어 황산벌을 막게 했다.
 
당나라 군대는 백강에서 의직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먼저 사비성에 이르렀다. 그러나 [[8월 20일]]([[음력 7월 9일]]) 신라군이 황산벌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은 이미 황산부근(탑정호 저수지 위치)3곳에 진영을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백제 달솔 계백은 좌평 충상, 달솔 상영과 함께 백제군을 지휘하였다. 당시 백제의 총 군사는 세 곳에 5천씩 총 1만 5천으로 추정되며, 가장 유명한 전투는 계백이 신라에 맞서 싸운 [[황산벌 전투]]이다. 계백과 의직은 전사하고, 충상과 상영은 사로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