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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4년]] [[캔자스 네브래스카 법]]은 [[캔자스 준주]]와 [[네브래스카 준주]]를 설립하고 미국인 개척자 땅을 개방하게 되었다. 이 법은 2개의 준주가 주로 승격할 때 노예 제도를 인정 여부를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것으로 실질적으로 [[미주리 타협]]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이 주민들에게 결정하게 한다는 개념은 현재 ‘주민 주권’이라는 것으로, 미국 상원 의원, 상원 영토 문제 전문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던 [[스티븐 더글러스]]가 제창한 것이었다. 주민 주권은 서부와 북부의 새로운 준주에 노예 제도를 확대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하며, 남부 주에 양보하는 시도였다. 이 원칙은 캔자스 준주에서 ‘불법 거주자 주권’이라고 하여, [[루이스 카스]] 상원 의원은 시행을 방해했다. 카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데일리 유니언’에 투고한 글에서 그것을 이론적 구조를 제공함으로써 ‘주민 주권의 아버지’(''Father of Popular Sovereignty'')라는 호칭을 받았다. 또한 카스는 184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도 지명되었다.<ref>{{cite book|last=Klunder|first=Willard Carl|title=Lewis Cass and the Politics of Moderation|url=http://books.google.com/books?id=XlQHi_dJyRUC&pg=PP1&dq=isbn=9780873385367&ei=_i8eSJTuGpjwtAPMnf3lBg&sig=oJi7Vp5R9z6B-8wJ5EDqWiVB77s#PPA2,M1|accessdate=2008-05-04|year=1996|page=168|publisher=[[Kent State University Press]]|location=Kent, OH|isbn=0-87338-536-5}}</ref>
 
당초 캔자스 준주에 들어와 노예 소유주가 되는 사람들은 극히 적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캔자스가 노예를 활용하여 이익을 내기에는 너무 북방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주리 강을 따라 캔자스 준주 동부는 인접한 건너편에 있는 미주리의 ‘블랙 벨트’와 마찬가지로 노예를 이용한 농업에 적합했다. 캔자스 준주에 주 정부를 만들고 그곳을 어떤 주로 할 지에 대한 문제는 그 주 경계를 넘어 매우 정치적인 사안이 되었다.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노예 주]]인 [[미주리 주]]는 북쪽으로 [[아이오와 주]], 동쪽으로 [[일리노이 주]]에 접하는 곳으로 주변이 모두 [[자유 주]]에 접하는 [[노예 주로는 그 밖에 없는 같은주]]로는 곳에고립된 위치하고위치에 있었다. 주의 대다수는 노예가 없었고, 노예 소유자 수는 주 인구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것이었다. 캔자스가 자유 주로 미합중국에 가입하면 미주리는 3면이 자유 주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었다. 노예 주와 자유 주 경계에 해당하는 주에서 노예 해방, 노예 제도 폐지 운동과 도망 노예가 반드시 생길 수 있었으므로, 옆에 자유 주가 있다는 것은 미주리의 노예 소유자에게 상당한 위협이었다.
 
미국 상원은 각 주에 2명의 의원이 할당하게 되어 있었다. 당시 노예 주 수와 자유 주의 수가 엇비슷했기 때문에 하나의 주를 추가하는 것은 그 균형을 무너뜨려 노예 주의 기득권을 저해 할 우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