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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2010|origyear=|page=56|pages=|publisher=Enslow|place=|url=http://books.google.com/books?id=g9vccT4QhlIC&lpg=PA56|accessdate=|isbn=9780766033559|oclc=}}</ref>
 
[[6월 2일]], 존 브라운은 블랙 잭 전투에서 노예제도 지지자 헨리 클레이 페이트(이후 남군 대령)와 다른 22명을 포로로 잡았다. 1856년 공식적인 준주의 주도는 로렌스에서 불과 3km 떨어진 레컴프턴으로 옮겨졌다. 같은 해 4월 연방 하원 조사위원회의 3명이 레컴프턴에 도착하여, 사태를 조사했다. 위원회 보고서의 대부분은 보더 러피안의 간섭으로 선거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피어스 대통령은 위원회의 권고는 따르지 않고 노예 제도 찬성론자들이 구성한 의회를 캔자스 준주의 합법 의회로 인정했다. 사실 [[1865년]] [[7월 4일]], 피어스 대통령은 토피카의 그림자 정부를 해산시키기 위해 연방군을 파견했던 것이다.
[[6월 2일]], 존 브라운은 블랙 잭 전투에서 노예제도 지지자 헨리 클레이 페이트(이후 남군 대령)와 다른 22명을 포로로 잡았다.
 
[[1856년]] 8월 수천 명의 노예제 지지들이 군대를 결성하여 캔자스 준주로 행군했다. 같은 달 브라운과 추종자들은 ‘[[오사와토미 전투]]’에서 노예 제도 지지자 400명으로 구성된 병력과 교전을 벌였다. 이 적대 관계는 2개월이 이어졌고, 이후 브라운은 캔자스 준주를 떠나 새로운 준주 주지사 존 W. 게리가 취임하여 양측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마지막 대규모 폭력 사태는 1858년에 보더 러피안이 5명의 자유 주 주민을 살해한 [[메르데 시그너스 학살]]에 촉발된 것이었다. 피의 캔자스의 폭력 사태로 1859년에 끝날 때까지 총 56명이 죽었다. [[1861년]]에 [[남북 전쟁]]이 시작된 데 이어, 캔자스와 미주리 주 경계선에서 추가적인 게릴라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헌법 투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