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 (오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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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견제===
[[조조 (전한)|조조]](鼂錯)는 황태자의 가령(家令)이 되어 황태자의 총애를 받자, 한가한 틈을 타 오나라는 죄를 자주 지었으므로 봉지를 줄여야깎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문제에게도 여러 차례 상주하였으나, 문제는 관용을 베풀고 차마 벌하지 못하였다. 오나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멋대로 행동하였다. [[전한 경제|경제]](景帝)가 즉위한 후, 조조는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임명되었다. 조조는 또 유비를 비난하며 경제를 설득하였다.
 
==오초칠국의 난==
결국 한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오나라의 봉지를 깎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유비는 이를 두려워하다가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먼저 유비는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을 포섭하기 위하여 중대부(中大夫) 응고(應高)를 보냈다. 유앙은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응고의 설득으로 협조하기로 약속하였다. 응고의 보고를 받은 유비는 재차 의심하여, 직접 교서로 가 유앙에게 약속을 받았다. 이에 어떤 신하가 유앙에게 간하였으나, 유앙은 듣지 않고 사자를 보내 제(齊)나라 · 치천(淄川) · 교동(膠東) · 제남(濟南) · 제북(濟北)과 맹약을 맺었다.
 
당시 제후들 중에는 봉지를 깎이는 벌을 받고 조조를 원망하는 자가 많았다. 오나라의 봉지 중 회계와 예장을 깎는다는 조서가 도착하자, 유비가 먼저 병사를 일으켰다. 교서에서는 한나라가 보낸 관리들의 목을 베었고, 교동 · 치천 · 제남 · 초나라 · 조(趙)나라도 그렇게 하고는 병사를 동원하여 서쪽으로 향하였다.
 
제나라 왕은 반란에 가담한 것을 후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제북왕은 낭중령(郞中令)이 협박하고 감시하였기 때문에 병사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