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평사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 로봇: 자동으로 텍스트 교체 (-\{\{토막글\|(.*?)한국근현대사(.*?)\}\} +{{토막글|\1한국 근현대사\2}}) |
잔글편집 요약 없음 |
||
1번째 줄:
'''형평사 운동'''(衡平社運動)이란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을 말한다. [[1923년]] 4월, [[일본 제국|일본]]에서 전개된 수평운동의 영향을 받아 [[경남]] [[진주]]에서 [[이학찬]], [[강상호]], [[신현수]], [[친석구]], [[장지필]] 등이 조직을 결성했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 배경 ==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 시대에는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도살업(屠殺業)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백정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해방의안'(解放議案)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백정들은 기와집에서 살거나 비단옷을 입을 수 없었고, 외출할 때는 상투를 틀지 않은 채 '패랭이'를 써야 했으며, 장례 때도 상여를 사용할 수 없었다. 또한 학교나 교회에서도 함께 수업을 받거나 예배를 볼 수 없었고, 상민들과 떨어져 집단으로 거주했다. 더욱이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존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행정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즉 민적(民籍)에 올릴 때 이름 앞에 '붉은 점' 등으로 표시하거나 도한(屠漢)으로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서류에도 반드시 신분을 표시하도록 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불만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 전개 ==
[[1923년]] [[4월 25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강상호]](姜相鎬)·[[신현수]](申鉉壽)·[[천석구]](千錫九) 등 양반 출신 사회운동가들과 [[장지필]](張志弼)과 같은 [[백정]] 출신 지식인, [[이학찬]](李學贊)과 같은 경제력을 갖고 있던 백정은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에 대한 모욕적인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상호 친목을 도모하여 '[[백정]]도 참다운 인간이 되게 한다.'
그러나 다른 사회운동단체의 지원에 힘입어 양파의 통일은 진전을 보여, 1925년 4월 양파 합동으로 [[경성부]]에서 '전조선형평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이후 운동은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1924년]]부터 조직된 형평청년회·형평학우동맹의 구성원들이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하면서 다른 사회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나갔는데, 이러한 형평사의 조직과 운동의 확대에 힘입어 형평청년회는 조선형평청년총동맹으로 발전되었다. 이에 [[1926년]] 1월 장지필은 '재경(在京) 사상단체 합동신년간친회'에서 형평운동 부분을 보고하고, 조직강화와 무산운동(無産運動)으로의 진출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26년]] 12월 '고려혁명당사건'으로 [[서광훈]](徐光勳)·[[장지필]] 등 간부들이 구속되자 [[1927년]] 4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형평사대회에서 명칭을 조선형평사총본부로 바꾸고, [[1928년]] 4월 제6차 정기총회에서는 일본 수평사(水平社)와의 제휴를 정식으로 결정했다. 이 시기부터 다른 사회운동과의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인 평등운동을 주장하는 구파 간의 대립이 다시 일어나 1929년 제7차 정기대회에서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후 신파는 형평사 해소론을 제기했으며, 해소론을 둘러싼 대립은
== 의의와 한계 ==
형평운동은 형평사 창립 초기부터 많은 시련에
==
* [[신간회]]
* [http://foodi2.blog.me/30142207864 진주냉면과 진주비빔밥, 그리고 형평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