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697 바이트 추가됨 ,  6년 전
편집 요약 없음
{{장군 정보
'''이방실'''('''李芳實''', ? ~ [[1362년]])은 [[고려]] 말기의 무신이다.
|이름 = 이방실(李芳實)
|그림 =
|설명 =
|시대 = [[고려]] 말기(14세기)
|출생 = 미상
|사망 = [[공민왕]] 11년([[1362년]]) 2월 29일
|자(字) =
|다른 이름 =
|시호 =
|묘소 = 경기도 가평군 가평리 하색읍 산81
|관직 = 봉호: 추성협보공신, 직책: 중랑장, 호군, 대호군, 추밀원부사,
|주군 = [[충목왕]] → [[충정왕]] → [[공민왕]]
|가문 = 함안 이씨
|부모 =
|형제 =
|부인 = 진양부인(晋陽夫人) 진주 강씨(晋州姜氏), 정부인(貞夫人) 영산 신씨(靈山辛氏)
|자녀 = 중문(中文)
|사당 =
|기타 이력 =
}}
'''이방실'''('''李芳實''', ? ~ [[1362년]] [[음력 2월 29일|2월 29일]])은 [[고려]] 말기의 무신이다.
 
== 약력 ==
개선한 뒤인 3월 26일에 추성협보공신(推誠恊輔功臣)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다. 여름 4월에 홍건적은 다시 70여 척의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도]](西海道)의 [[풍천군|풍주]](豐州) 벽달포(碧達浦)와 서경의 덕도(德島)ㆍ석도(席島) 등지에 정박해 [[봉산군|봉주]](鳳州)의 성문을 불태우고, 1백여 척으로 [[안악군|안악]](安岳)에서 돈과 곡식을 약탈하였으며 [[황주]](黃州)ㆍ안주까지 쳐들어왔고, 이방실은 4월 3일에 예주(豐州)에서 홍건적을 쳐서 30여 급을 베었다. 홍건적 선단이 물러간 뒤인 17일에 공민왕은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며 이방실에게 옥대(玉帶) · 옥영(玉纓)을 내렸는데, [[노국공주]]가 「전하께서는 어찌 이토록 지극한 보배를 아끼지 않으시고 남에게 주시나이까.」라고 묻자 「우리 종묘 사직을 폐허가 되지 않게 하고, 백성들을 어육(魚肉)이 되지 않게 한 것은 모두 이방실의 공이다. 내가 살을 베어 줘도 이 공에 보답할 수 없는데 이러한 보물쯤이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한편 반성(潘誠)ㆍ사류(沙劉)ㆍ관선생(關先生)ㆍ주원수(朱元帥) 등이 이끄는 홍건적 10만 명이 공민왕 10년([[1361년]]) 10월 14일에 다시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와 [[삭주군|삭주]](朔州) · 니성(泥城)을 약탈했고([[홍건적의 고려 침공|제2차 홍건적의 난]]) 이방실은 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가 되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이여경(李餘慶)이 절령(岊嶺)에 파견되어 목책을 쌓았다. 11월 2일에 홍건적이 [[영변군|무주]](撫州)까지 이르자, 이방실은 적은 많고 아군은 적다고 생각하고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면서, [[순안군|순주]](順州) · [[은산군|은주]](殷州) · 성주(成州)의 3주와 양암현(陽岩縣) · 수덕현(樹德縣) · 강동현(江東縣) · 삼등현(三登縣) · 상원현(祥原縣)의 다섯 현의 백성들과 그 곡식을 절령 목책으로 옮길 것을 조정에 청했고 왕은 이것을 허락하였다.
 
이후 이방실은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류계조(柳繼祖), 대장군 최준(崔準) 등을 [[박천군|박주]](博州)로 보내 적을 쳐서 이기고, 다시 안우,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더불어 [[개천군|개주]](价州)에서 홍건적을 쳐서 150여 명을 베었으며, 1백 기(騎)의 군사로 연주(延州)에서 20여 급을 베었다. 그러나 안주(安州)에서 홍건적의 습격을 당해 고려군은 패하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도 전사했으며 김경제는 사로잡혔다. 공민왕은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 · 김두(金㺩)를 더 보내어 절령의 목책을 지키게 했지만, 홍건적은 밤중에 복병 1만여 명을 목책 가까운 옆에 숨겨두었다가 새벽에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으로 목책의 문을 쳐서 부수었다.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안우 · 김득배 등은 단기(單騎)로 도망쳤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파천할 생각을 굳혔고, 김용 · 안우· 이방실 · 최영 등의 만류에도 11월 19일, 개경을 떠나 남쪽의 복주(福州)로 향했다. 24일에 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다. 이듬해인 공민왕 11년([[1362년]]) 1월 17일, 안우 · 이방실 · 김득배 · 황상(黃裳) · 한방신(韓方信) · 이여경 · 안우경(安遇慶) · 이귀수(李龜壽) · [[최영]](崔瑩) · [[이성계]] 등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 교외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개경을 포위하고 총병관 정세운이 도솔원(兜率院)에서 군사를 지휘했다. 18일에 사면에서 총공격하여 개경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그러나 일찍부터 총병관 정세운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용이 정세운을 제거하고 그 죄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공민왕의 교지를 위조하여 자신의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의 편으로 안우, 이방실에게 보내어 그들이 정세운을 죽이도록 부추겼다. 안우와 이방실은 김득배를 설득해 1월 22일, 술자리를 마련하여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초청한 뒤, 정세운이 도착하자 장사들을 시켜 좌중에서 때려 죽였다. 정세운이 죽은 다음날인 23일에 승전 소식이 복주의 공민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정세운이 죽었다는 소식에 직문하(直門下) 김진(金瑱)을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정세운을 죽인 것을 용서할 뜻을 밝히고 또한 왕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을 권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했는데, 복주수(福州守) 박지영(朴之英)이 재상들에게 「이방실이 홀로 세운을 죽였고 우 등도 또한 해를 입었다.」고 전하여, 왕은 다른 변이 있을 까 두려워 곧 김진을 불러들이고 친히 군사를 일으키려 했는데, 판태의감사(判太醫監事) 김현(金賢), 상장군 홍사우(洪師禹)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비난한 내용이 담긴 글을 왕에게 바쳤고 왕은 그제야 기뻐하며 다시 김진 등을 보내 여러 장수들을 용서하겠다는 명을 반포하게 하였다(《고려사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