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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방실은 판사농사(判司農事) 조천주(趙天柱), 좌승(左丞) 류계조(柳繼祖), 대장군 최준(崔準) 등을 [[박천군|박주]](博州)로 보내 적을 쳐서 이기고, 다시 안우, 지휘사(指揮使) 김경제(金景磾)와 더불어 [[개천군|개주]](价州)에서 홍건적을 쳐서 150여 명을 베었으며, 1백 기(騎)의 군사로 연주(延州)에서 20여 급을 베었다. 그러나 안주(安州)에서 홍건적의 습격을 당해 고려군은 패하고 상장군 이음과 조천주도 전사했으며 김경제는 사로잡혔다. 공민왕은 밀직제학(密直提學) 정사도(鄭思道) · 김두(金㺩)를 더 보내어 절령의 목책을 지키게 했지만, 홍건적은 밤중에 복병 1만여 명을 목책 가까운 옆에 숨겨두었다가 새벽에 닭이 울자 철기(鐵騎) 5천으로 목책의 문을 쳐서 부수었다. 고려군은 크게 패하고 안우 · 김득배 등은 단기(單騎)로 도망쳤다.
 
공민왕은 남쪽으로 파천할 생각을 굳혔고, 김용 · 안우· 이방실 · 최영 등의 만류에도 11월 19일, 개경을 떠나 남쪽의 복주(福州)로 향했다. 24일에 개경은 홍건적에게 함락되었다. 이듬해인 공민왕 11년([[1362년]]) 1월 17일, 안우 · 이방실 · 김득배 · 황상(黃裳) · 한방신(韓方信) · 이여경 · 안우경(安遇慶) · 이귀수(李龜壽) · [[최영]](崔瑩) · [[이성계]] 등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동쪽 교외의 천수사(天壽寺) 앞에 주둔하였으며, 여러 장수들이 개경을 포위하고 총병관 정세운이 도솔원(兜率院)에서 군사를 지휘했다. 18일에 사면에서 총공격하여 개경을 탈환하였다. 이 공으로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그러나 일찍부터 총병관 정세운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용이 정세운을 제거하고 그 죄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공민왕의 교지를 위조하여 자신의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의 편으로 안우, 이방실에게 보내어 그들이 정세운을 죽이도록 부추겼다. 안우와 이방실은 김득배를 설득해 1월 22일, 술자리를 마련하여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초청한 뒤, 정세운이 도착하자 장사들을 시켜 좌중에서 때려 죽였다. 정세운이 죽은 다음날인 23일에 승전 소식이 복주의 공민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정세운이 죽었다는 소식에 직문하(直門下) 김진(金瑱)을 보내 여러 장수들에게 정세운을 죽인 것을 용서할 뜻을 밝히고 또한 왕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을 권하여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 했는데, 복주수(福州守) 박지영(朴之英)이 재상들에게 「이방실이 홀로 세운을 죽였고 우 등도 또한 해를 입었다.」고 전하여, 왕은 다른 변이 있을 까 두려워 곧 김진을 불러들이고 친히 군사를 일으키려 했는데, 판태의감사(判太醫監事) 김현(金賢), 상장군 홍사우(洪師禹)가 와서 여러 장수들이 정세운을 비난한 내용이 담긴 글을 왕에게 바쳤고 왕은 그제야 기뻐하며 다시 김진 등을 보내 여러 장수들을 용서하겠다는 명을 반포하게 하였다(《고려사절요》). 아울러 28일, 지주사(知奏事) 원송수(元松壽)를 보내어 여러 장수들에게 옷과 술을 내리면서, 이방실에게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를 주었다.
 
정세운을 죽인 김용은 2월 29일에 행재소로 온 안우를 목인길을 시켜 끌어내 죽인 뒤, 공민왕을 달래어 「안우 등이 충성하지 못하여 제마음대로 정세운을 죽였기 때문에 그는 이미 죄를 받았다. 김득배와 이방실을 붙잡아 오는 자는 중한 상을 준다.」는 방을 붙이고 대장군 오인택(吳仁澤), 만호 박춘(朴椿)ㆍ김유(金庾)ㆍ정지상(鄭之祥) 등을 나누어 보내 그들을 체포하게 하였다. 이 날 이방실은 왕이 있는 행재소(당시 왕은 복주를 떠나 상주에 있었다)에 나아가려고 [[용궁현]](龍宮縣)까지 왔었는데, 박춘이 왕의 교지가 있다고 하여 이방실이 뜰에 내려가 꿇어앉자 오인택이 칼을 뽑아 이방실을 쳤다. 이방실은 곧 넘어져 기절하였다가 한참 만에 다시 깨어나 담을 넘어 도망쳤고, 박춘이 그를 쫓아가 붙잡자 이방실은 박춘이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맞서려 했으나 정지상이 뒤에서 이방실을 쳐서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