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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2|그때 [[1919년]] 조선독립운동단체들의 정치적 경향이 여러 가지 이었다. 례를 들면 1) 동경정부 청원단 : 민원식, 려운형 등. 민원식이는 동경호텔에서 애국청년 [[양근환|량근환]]의 손에 피살되었고, 려운형이는 엄밀한 일본보호로서 상해에 도라왔고, 2) 파리쓰 렬강회의에 청원단 : [[리승만]], [[김규식]], 윤해, 고창일 등(윤해, 고창일이는 원동 [[연해주]] 고려인 소위 "[[국민회의]]" 대표다) 3). 제네바 제2국제당 청원단 : [[조소앙]], [[이관용 (독립운동가)|리관용]] 등인데 제2국제당 회의에서 조선독립승인 받었다고 신문에(조선신문들) 떠들썩 기재하였다. 이 어리석고 비루한 경향들은 조선독립운동에 큰 해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빨지산 운동에 더욱히 방해를 주었다.<ref name="parkhuan234">박환, 《재소한인민족운동사:한국사 연구총서 1》(국학자료원, 1998) 234페이지</ref>|독립운동가 [[김규면]] 비망록에서}}
 
[[1921년]] [[2월 15일]]에 도쿄에 나타난 [[양근환]]은 시중에서 단도 1개를 사가지고 [[2월 16일]] 오전, [[도쿄역]] 호텔 2층 제14호실에서 자신은 일본대학에 다니는 이기영이라고 거짓 이름을 대고, 조선학생으로 조직한 동우회에서 그대의 환영회를 열터이니 참석하려느냐고 의사를 물은 뒤 [[2월 16일]] 면담을 요청하였다. [[2월 16일]] 오전 9시 30분 [[도쿄]] 데이고쿠 호텔 14호실 입구에서 [[목수]]로 위장한 [[민족주의|민족주의자]] [[양근환]]에게 칼을 맞아 살해당했다. 당시 자신을 목수라고 소개한 [[일본]] 옷차림의 청년이 그를 방문, 대화 도중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것은 매국노짓"이라면서 논쟁을 벌이다가 소지한 칼로 그를 찔러 [[중태]]에 빠뜨리고 도망쳤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호텔 직원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그는 도쿄 시내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그는 [[복부]]와 [[이마]]를 여러방 찔렸다.<ref>"名刑事 手帖에서, 梁槿煥 捷捕 秘話, 東京警視廳 大澤刑事 手記", 삼천리 제11권 제7호(1939년 6월호), (삼천리사, 1939)</ref> 이보다 앞서 민원식이 위독하다는 보고가 일본 국왕에게 도달되었는데 일왕은 특지로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충량하였던 그를 정5위 훈4등에 서하고 중추원 찬의를 수여하였다.
[[1921년]] [[2월 16일]] 오전 9시 30분 [[도쿄]] 데이고쿠 호텔 14호실 입구에서 [[목수]]로 위장한 [[민족주의|민족주의자]] [[양근환]]에게 칼을 맞아 살해당했다. 당시 자신을 목수라고 소개한 [[일본]] 옷차림의 청년이 그를 방문, 대화 도중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 때에 [[참정권]] 운동을 벌이는 것은 매국노짓"이라면서 논쟁을 벌이다가 소지한 칼로 그를 찔러 [[중태]]에 빠뜨리고 도망쳤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호텔 직원은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그는 도쿄 시내 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그는 [[복부]]와 [[이마]]를 여러방 찔렸다.<ref>"名刑事 手帖에서, 梁槿煥 捷捕 秘話, 東京警視廳 大澤刑事 手記", 삼천리 제11권 제7호(1939년 6월호), (삼천리사, 1939)</ref> 이보다 앞서 민원식이 위독하다는 보고가 일본 국왕에게 도달되었는데 일왕은 특지로서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충량하였던 그를 정5위 훈4등에 서하고 중추원 찬의를 수여하였다. [[2월 17일]] 오전 [[도쿄제국대학]] 병원에서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2월 18일]] 그의 피습 사망 소식을 듣고 부인 [[엄채덕]], 장인 [[엄준원]], [[국민협회]] 총무간사 5명, 총독부 순사 등이 [[도쿄]]로 건너가 그의 시신을 확인하고 [[2월 19일]] 귀국했다.
 
==== 사망 직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