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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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이력= 도야마일본육군학교 수료
}}
'''서재필'''(徐載弼,[[1864년]] [[1월 7일]]~[[1951년]] [[1월 5일]])은 [[조선]]의 문관 겸 군인으로 [[개화당|개화파]]의 한사람이며 [[독립운동가]], 언론인, [[군의관]], [[정치인]], [[해부학|해부학자]], [[의사]]이다. [[김성근 (1835년)|김성근]],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으로서 과거시험에 최연소 급제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에 실패해 가족들이 거의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가 됐고 홀홀단신 미국에 망명해 죽을 고비도 수십 차례 넘겼다. 동양에서 온 망명객이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사는 걸보고 감동한 미국인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현지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고,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의사 면허까지 따 개원했다. [[대한제국]] 건국 후 사면복권되어 귀국했고 [[독립신문]] 편집장이 됐지만, 일제가 조선을 병합하자 다시 도미해 미국에서 여러 방면으로 독립을 지원했다. 해방 후 대통령 후보로 추대될 뻔 하기도 했으나 스스로 사양하고 미국에서 삶을 마쳤다.
 
본관은 [[달성 서씨|대구]]로 자(字)는 윤경(允卿), [[호 (이름)|호]]는 송재(松齋)·쌍경(雙慶)이며, 영문명은 'Philip Jaisohn'으로 일명 피제손 혹은 제선<ref name="hist37scn">{{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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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과서의 독립협회 서술은 잘못되었다
|인용문=그러나 그는 귀국 후 단 한 번도 자신을 이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고 '''필립 제이슨''' 또는 '''피제손'''으로 표기하였다.
}}</ref>. 필명은 오씨어(N. H. Osia)<ref name="hansu1">[http://www.kormedi.com/news/article/1199475_2892.html 의사-언론인 서재필, 소설가이기도 했다], 코메디닷컴, [[2010년]] [[12월 2일]]</ref>. [[전라남도]] [[보성군]] 태생으로 [[충청남도]] [[논산시]]에서 자랐다. [[김성근 (1835년)|김성근]],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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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과 장남 서재춘, 서자 재형<ref>매천야록에는 그가 친형으로 되어 있는데 오기이다.</ref>을 뒀고 이어 남동생 [[서재창]], 서재우와 여동생 서기석이 태어났다.
 
서재필의 아명은 쌍경으로, 관례 후 이름을 재필, 자는 윤경(允卿)으로 썼는데 훗날 아명이었던 쌍경을 아호로 재사용하였다. 본래 서재필의 집안은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조선의 패망 원인을 당파 싸움으로 본 만년의 서재필은 누가 당색을 따져묻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단순히북학파의 학술적사상은 목적에서소론과 남인의 실학 사상과 맥이 닿아 약간 헷갈리는 점이 있어 물어도 그는 한사코 대답을 피했다고 한다피했다. 그 실례로 후일 경성여상<small>(現 서울여상)</small> 교장이자 공군사관학교 교수였던 [[김도태]]와의 인터뷰 중 '나는 [[노론]]이 뭐고 [[소론]]이 무엇인지 모른다!'며 일갈하기도 했다.
 
==== 유년기와 양자 입양 ====
하루는 어린 서재필이 여름날 전라도 외갓집에 가 놀다가 정자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는 참이었다. 신임 사또사또의 부임 행차가 마침 지나가다 멈췄는데, 근처에서 알짱거리던 어린 서재필을 귀엽게 생각한 사또가 '아가, 너 노래 한번 불러 봐라'라고 말을 붙였다. 그러자 어린 꼬마가 당돌하게 '네, 근데...부채를 빌려주시면 장단을 맞춰 보겠습니다'라길래 부채를 건냈더니, 남의 쥘부채를 잘도 착착 두드리며 한곡조한곡조를 뽑았다 한다. 사또가 이름이 뭐냐 묻자 다시 당돌하게 "쌍경입니다쌍경이라 합니다. 제 부친이 [[진사]] 급제한 해에 태어나서 겹경사라고 쌍경이라 했답니다."라 대답했다. 씩씩한 태도에 유쾌해진 사또가 서재필의 본관, 가계를 묻고는 '크게 될 놈이구먼'하며 임지로 다시 향했다한다향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서재필을 아는 사람들은 남들보다 머리 하나 이상 큰 그의 큰 체구를 늘 화제에 올렸는데, 어린 시절부터도 원체 덩치가기운이 좋아 골목 대장 노릇을 도맡았다.<ref name="songgun21"/> 서재필은그래서 어려서부터그의 지적후손들은 호기심이아이들이 많았으며나약하거나 알고잘못을 싶은저지르면 "[[미국]] 많아할아버지는 적극적으로 묻거나그러셨다"라고 몸소훈계하기도 찾아다녔다고한다고 한다.<ref 성장후에도name="songgun21"/> 서양서재필은 정치사, 의학, 세균학, 군대 전술 등 다양한 분야에어려서부터 해박한 지식을 자랑했으며, 평소 잘 굽힐 줄 모르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한다강하였다. 그의 평생의 동지 [[윤치호]]에 의하면 이런 기질로 인해 그는 종종 주변인들로부터 적잖은 빈축과 험담을 사기도 했다고샀다고 한다.
 
서재필은 아들이 없었던 7촌 재종당숙 서광하에게 입양되어<ref name="fisasa">{{서적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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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31~32쪽
|꺾쇠표=예
}}</ref> 본가에서 그리 멀지않은 진잠면에서 살았는데, 본디 충청도충청도가 그의 태생은 아니지만아님에도, 이런 성장기의 인연으로 [[2005년]] [[3월 3일]] 이래이후 금곡리에서금곡 서재필1리에 그를 기리는 사당이 세워져 추모제가 매년 거행되고 있다.<ref>[http://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281 송재 서재필 박사 추모제 거행] -2005.03.04 충청투데이 기사</ref> 훗날 그는 자신의 자전적 소설인 '[[한수의 여행]]'<small>(1922년 作)</small>에서 소년 박한수의 생이별과 미래에의 기대, 설레임 등을 통해 입양자신의 당시 자신의 감정을 세밀히 묘사했다. 아울러나중에 영화화도사면귀국했을 진행시켰으나 사정이'한수의 별로여행'을 영화화하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 과거 준비와 청소년기 ====
서재필의 양어머니는 세도가문 [[안동 김씨]]로, [[판서]] [[김온순 (1812년)|김온순]]의 딸이었다. 두 내외는 어린 서재필을 [[이조 (행정기관)|이조]][[참판]]으로 벼슬을 살던 서울 처남 [[김성근 (1835년)|김성근]]에게 보내 교육을 부탁했다.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 등도 배우고 글공부가 좀 쌓인 후부터는 [[사서 오경]]을 암송했는데 뜻을 모르는 게 있어도 일단 전부 암기가 가능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했다고 한다. 거기서 같은 문하생으로 평생 동지가 되는 [[서광범]]과 [[김옥균]]을 만나게 되었다. 불과 5살 손위 서광범은 그의 11촌 아저씨뻘이기도 했다. 그는 저서 '회고갑신정변'에서 특히 김옥균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인용문2| …나는 그가 대인격자였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였음을 확신'''한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서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로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힘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었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주입하고 일신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는 일반 사회의 구투(舊套) 인습을 일변시켜야 할 필요를 확각(確覺)하였다…<small>(중략)</small>…그는 구미의 문명이 일조일석의 것이 아니고 열국간 경쟁적 노력에 의한 점진적인 결과로 몇 세기를 요한 것이었는데, 일본은 한 대(代) 안에 그것을 달성한 양으로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히 일본을 모델로 치고 조선을 개혁시킴에, 일본의 우의와 조력을 청하여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small>(중략)</small>…누구누구 하여도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끼친 이는 김옥균이었다.''' 그의 서와 평문은 물론이고 사죽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데 없는 그 높은 재기는 나를 사로잡지 않고는 마지아니하였다. 나는 그에게 십여 년 연하이었으므로 그는 나를 늘 동생이라고 하였다…<small>(중략)</small>…|회고갑신정변 中 <small>(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자 부록2면부록 게재2면 연재, 서재필, [[변영로]] 옮김)</small>}}
서재필은 그들을 통해 [[박규수]], [[오경석]], [[유대치]] 등의 문하에도 출입하면서 서양 수학, 망원경, 지구본, 지도, 화약, 손목시계 등 신문물을 접하게 되었고 [[박영효]]와도 사귀게 되면서 [[개화당]] 인맥을 만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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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은 본격적인 개화당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정신적 지주 [[김옥균]]은 띠동갑이었던 서재필을 항상 아우님이라고 다정하게 불렀다한다. 충의계 동지들인 [[박영효]], [[홍영식]], [[윤치호]], [[이상재]], [[박정양]], [[유길준]] 등은 서대문 밖 봉원사를 아지트로 삼고 늘 의견을 나눴다.
 
봉원사에는 개화파 승려인 [[이동인]]이 주지로 있었다. [[부산]] 출신인 그는 당시 부산포에 재선(在鮮) 일본인 종교시설로 들어와있던 [[정토진종|혼간사(本願寺)]]에서 일본어를 일본인들과배웠으며 일본인들과도 교류가 깊었고 일본어도 익혀, 서구 문물에 관한 일본일본어 번역서적들을 주로 들여와 젊은이들에게 퍼뜨렸다. 그들은 일본어야 잘 몰랐지만 경전에 통달해 있는 유학자들에게 일본서적의 한자들은 너무나 기초적인 것이었다.
{{인용문2|어느해 봄철이던가? [[김옥균]]이 여러 사람을 데리고 [[서대문]] 너머 절에 놀러가자는 거야. 그래 갔더니 중 하나가 있는데 사람이 매우 공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이었어. 한데 이 중이 세계 여러 나라 도시며 군인의 모양 같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단 말이야? 그걸 글라스 너머로 보는데 그 이름이...옳치! 요지경! 요지경을 보는데 다들 처음 보는 거라 너무 재미있단 말이야. 그리고 이 중이 어떻게 구했는지 일본책인 만국사기(萬國史記)를 내밀었는데 이 책으로 여러 나라 이름이며 내용을 대강 알 수가 있었거든. 그래서 [[김옥균]]이 이런 책을 어디서 또 구할 수 있느냐 하니까 책뿐 아니라 무엇이든지 돈만 있으면 구할수 있다고 한단 말이야? 그래서 김옥균이가 돈을 쥐어주고 책이며 여러 가지 물건을 사오라 시켰지.|해방 후 귀국 인터뷰에서}}
이동인은 일본책, 사진, 성냥 같은 것을 부산에서 계속 사다 날랐다. 이미 일본은 [[메이지 유신]]도 20년이나 지난 상황이라입장이라 서양 역사책이나 지리, 물리, 화학 관련 번역서적들이서적이 널리 대중화돼 있었다. 조선에선 아직엄연히 금서(禁書)들이었기 때문에 개화당 동지들은 눈을 피해 동대문 밖 영도사(永導寺)로 자리를 옮겨 거듭 탐독하고 토론했다서로 토론하였다.
{{인용문2|모두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충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국민의 권리를 세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란 중이 우리를 인도해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니 새절이 [[개화파]]의 온상이었다 할 것이야.|해방 후 귀국 인터뷰에서 계속}}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윤치호]], [[유길준]] 등은 모두 [[1876년]] 작고한 [[북학파]] [[박규수]]의 문하생으로 스승에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열린 정신을 물려받았다. 서양 문물에 대한 책을 읽고 시국을 논하면서, 이제 이들은 친목계를단순히 호기심적인 '충의계'를 넘어 개화당이라는 실제 정치 조직을 구성하고 행동에 나설 때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 불과 2년 후 이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된 시작은 바로 봉원사 독서 모임이다모임이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막내였지만 제일 격렬했었다고 한다.
 
==== 일본 유학과 신문물 수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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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등이 게이오에서 재학하는 동안 김옥균이 가끔 일본에 공무로 방문하면서 항상 그들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는 그들의 학습 상황을 체크하고 강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자신의 본마음과 야망을 가감없이 동지들에게 드러내었다. 다음은 서재필의 후일담이다.
{{인용문2|그(김옥균)는 주일 한국공사는 아니었으나, 일본의 관리들과 일본에 파견된 외국 사절들에게 외교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교유를 하였던 것이다. 매 일요일이면 우리는 반드시 그와 도쿄 츠키지에 심방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우리를 친형제 같이 대접하고 숨김없고 남김없는 가슴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조국 쇄신에 대한 우리의 중차대한 임무를 말하는 동시에, 나라에 돌아가 우리가 빛나는 대공훈을 세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에 영국 노릇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김(김옥균)씨의 말을 신뢰하고, 우리 진로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우리의 이 책임을 이행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회고갑신정변 中<small>(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자 부록1면부록 게재1면 연재, <small>서재필 作, [[변영로]] 옮김)</small>}}
 
[[1884년]](고종 21년) [[1월]]에 드디어 수료하였다. 그들은 일본어만 배운 것이 아니고 메이지 유신과 무진 전쟁 등을 거쳐 자리잡은 서구식 제도와 문물을 눈여겨 봤다.<ref name="dong12">[http://www.donga.com/fbin/output?sfrm=2&n=199512130270 donga.com[뉴스&#93;-송재 서재필(해방공간의 주역:18)<!-- 봇이 따온 제목 -->]</ref>일본의 군사 시설과 경찰 제도 역시 세심히 살폈다. 체구가 크고 타고난 힘이 셌던 서재필은 같이 간 동기생들로부터 전통 무예도 배웠다. 이규완에게는 택견 품새를, 유술과 씨름에 능한 임은명에게서는 조르기, 누리기 등 유술(柔術) 전반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ref name="sosi74">포럼 편집부, 《푸른 꿈을 꾸다》 (포럼, 2007) 74페이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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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료 후 7개월 간은 [[육군 도야마 학교|도야마 일본육군 하사관학교]](富山陸軍下士官學敎)에서 총검술, 제식훈련 등 신식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는 후일 당시를 회고하면서 '우리는 졸업 후 귀국하면 사관학교를 세워 干城(간성)이 될 將材(장재)를 길러내 우리 나라를 세계에 뒤떨어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그들은 패기와 자부심으로 훈련에 힘을 쏟았고 지지신보(時事新報)에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물론 아시아의 후진국 조선이 산업화 선진국 일본을 배우러 온다는 쯤의 논조였다.
{{인용문2|서씨는 [[조선]]의 귀족임에도 엄격한 규칙을 준수하고 있다. 동기생들과 일과를 끝내고 귀숙(歸宿)한 후에도 흐트러짐 없이, 스스로 규칙을 정하고 다른 생도들을 책려(策勵)하며 병서 및 산술 등을 연구중이다.|-지지신보(時事新報) [[1884년]] [[2월 28일]]자 기사}}
[[1884년]] [[6월]] 수료 후 바로 [[조선]]에 돌아온 그들은 신식사관학교 건립을 주청하였고, [[병조]] 예하에 조련국(操鍊局)을 신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마침내 고종의 허가가 내려져 바로 조련국이 설치됐으나 서재필은 갑작스런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사망을 맞았다맞게 된다. 당시는 3년상을 모시는 것이 당연하므로상식이고 관습으로 바로그는 사직서를 내고 본가로 돌아갔다. 그런데 며칠 지나지않아 고종이 왕명으로특명으로 기복<ref>기복: 나라의 위급한 사정등으로 어명을 받고 상복을 벗는 일</ref>할 것을 명했다.
 
서재필은 급히 조련국 사관장에 임명되어 장교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았다맡게 됐다. 훈련 중 사관들을 데리고 입궐하라는 어명을 지키지 못한 일이 있었는데, 동부승지 김문현이 이를 탄핵하자 고종이 친히 김문현을 타일러 이를 무마시킬 정도로 임금의 총애를신임을 받고 있었다.<ref>승정원일기, [[1884년]]](고종 21년 갑신, 광서 10) 8월 21일자</ref>
 
그런데 야심차게 출발한 조련국이 갑작스럽게 폐지되었다. 일본의 제도가 침투되는 것을 우려한 청나라의 반대도 심했고 청의 눈치 보다도 군권을 장악해야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계산아래, [[명성황후]]의 조카인 [[민영익]] 등은 청의 장교등을 교관으로 하는 해방영(海防營)을 새로 설치했다. 개화파들은 이미 조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 있었고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민씨 정권의 견제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서재필을 비롯한 사관생도들은 즉시 예하 왕궁수비대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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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일천하 =====
[[파일:HongYeongSik.jpg|thumb|180px140px|[[홍영식]]]]
{{본문|갑신정변}}
[[1884년]] [[12월 4일]] 오후 6시 덕수궁 옆 [[정동]]에 신축한 [[우정국]] 낙성식에는 우정국총판 [[홍영식]]의 초청으로 낙성 축하연이 열렸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김옥균]]은 옆자리에 앉아있던 시마무라 서기관에게 은밀히 눈짓을 보내 일본군 동원을 준비시켰다. 연락을 받은 서재필은 바로 병력을 움직여 우정국 입구에 세워뒀다. 갑자기 북쪽 건물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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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국총판 이조연 등이 경우궁으로 쫓아와,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 큰 소리로 고하면서 고종을 만나려 했다. 이조연은 대원군을 압송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청국에 사신으로 갔었던 [[수구당]] 측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들고 "내가 이 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안에 들어가리를 허락할 수 없다"고 경고하고, 서재필의 부하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ref name="songkun70">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70페이지</ref> 이를 무시한 이조연과 한규직 등은 [[경우궁]] 후문으로 빙 돌아 들어가려 했다. 그들은 후문에 들어서자마자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 등에 의해 박살당했다.<ref name="songkun70"/>
 
이튿날 개화당은 발빠르게 신내각을 공표하고 명단을 발표하였다. 서재필은 병조참판[[병조]][[참판]] 겸 정령관에 임명됐다. 이들은 한때 [[개화당]]이었다가 등을 돌린 환관 유재현을 처단하고, [[조영하]](趙寧夏)와 [[민태호 (1834년)|민태호]](閔台鎬), [[민영목]] 등을 임금 앞에서 주살했다<ref>[http://163.180.153.49/pressian/6/%BB%F5%20%BD%C5%B9%AE%20%C7%C1%B7%B9%BD%C3%BE%C8.htm 갑신정변 다시 보기 - 근대화 10년 늦춘 '실패한 혁명'], 2003-03-17, 프레시안.</ref>. 그런데 신분제 폐지등의 혁신 정강 발표에도 불구하고 민심의 반응이 너무 조용했다. 백성을 위한 사명감에 거사한 그들에게 뭔가 국민적인 호응과 동참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과 달랐다. 게다가 민씨 잔당들이 급히 청에청을 호출하여 시급한사태 개입을 촉구했고, 압록강청의 너머에서기마대를 주둔중이던 청의필두로 병력이 속속 도착한 6일 아침부터 전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청을 맡기로 한 일본 군세가 약속과 달리 너무나 적었다. 군함도 오지 않았다. 뒷통수를 치는 듯한 일본의 처사에 개화당은 이를 북북 갈았다. 아니나 다를까 개화당의 병력과 일본 연합군은 채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후퇴를 시작했고 고종 내외의 신병도 다시 뺏겼다. 개화당은 백성들의 복지부동과 외세를청의 너무 믿었던 자신들의 어리석음을개입을 저주하며 민가로 뿔뿔히 흩어졌다.
 
[[12월 12일]]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개화당의 피신을 주선했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변수]](邊樹) 등 일행 8명은 [[창덕궁]] 북문을 빠져나가 변복한 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인도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곧 [[묄렌도르프]]의 추격대에게 꼬리를 잡혔다. 그들은 다시 일본인으로 위장해 [[제물포]]로 향했다. 오로지 살길은 밀항 뿐이었다.
===== 필사의 탈출 =====
[[12월 12일]] 다케조에 일본 공사가 개화당들을 피신시켰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변수(邊樹) 등 일행 8명은 [[창덕궁]] 북문을 빠져나가 변복한 후 인천주재 일본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인도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숨었다. 그러나 곧 수구파들이 보낸 [[묄렌도르프]]의 추격대에게 꼬리를 잡혔다. 그들은 다시 일본인으로 위장해 [[제물포]]로 향했다. 오로지 살길은 밀항 뿐이었다.
 
[[12월 13일]] 제물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국적 상선 치토세마루(千歲丸)에 마침내 개화당들이 탑승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묄렌도르프]]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다케조에에게 서재필과 김옥균 등의김옥균의 신병을 인도하라 요구했다. 배는 국제법상 치외법권으로서 해당 국가의 허락없이 타국 군대가 승선할 수 없지만, 만약 선장이 하선을 명령하면명령해 뭍에 내리는 순간 그들은 끝이었다. 이들은배안에서 품속의이를 독약을지켜보던 움켜쥐고이들은 배안에서품었던 초조하게독약으로 지켜보고자살까지 있었다결심한 위급상황이었다. 그런데 추격대와 면대해 뭔가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가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일행에게 어쩔수 없겠다며 내렸으면 하는 눈치를 줬다. 그러나 같이 승선해 있던 일본인들이 다케조에의 일처리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장 츠지(辻)도 이렇게 항의했다.
{{인용문2|내가 이 배에 이들을 승선시킨 것은 공사의 체면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당신 말만 믿고 일을 도모하다가 그르쳐 쫓기는 모양인데,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들더러 배에서 내리라는 것은 대체 무슨 도리인가? 이 배에 탄 이상 모든 것은 선장인 내 책임이니 도저히 이들을 배에서 내리게 할 수 없다.|-치토세마루 선장 츠지(辻)의 당시 발언}}
츠지는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 안탔다고 잡아떼고, 일본국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 권리가 없다, 임의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그들을 따돌렸다. 그들은 간신히 사지를 벗어났다.
 
===== 정변의 실패와 가족의 최후 =====
그들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지만 문제는 남은 가족들이었다. 서재필의 친아버지 서광효는 논산 감옥에 투옥됐고 맏아들과 같이 갖은 고문을 받은 끝에 '재필아, 만일 관노사령배가 문전에 오거든 잡혀가서 욕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결해라.<ref name="songgun109"/>'는 유서만 남긴채 옥중 자살했다. 친형 서재춘도아들이 아버지와역적이 같이되자 옥중에서며느리라도 음독했고살리려고 서재필의 양아버지는 그녀를 일부러 친정으로 쫓아냈다(양어머니 안동 김씨는 이미 이전에 자연사).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친정에선 출가외인이라며 문전박대했다.<ref name="songgun109">송건호, 이복《송건호전집 12》 서재형은(한길사, 관군에2002) 의해109페이지</ref> 현장에서장인 박살됐다김영석은 안그래도 집안이 풍비박살 날지 모르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신 딸에게 시집으로 돌아가 이걸 쓰라며 독약 한 첩을 들려 다시 돌려보냈다.<ref name="songgun109"/> 나중에 이를 알게된 서재필은 후일 사면복권된 후 미국에서 귀국한 뒤 장인이 자신을 찾아오자 거지 취급하고 문전에서 쫓아냈다.
 
친형 서재춘도 아버지와 같이 옥중에서 음독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의해 현장에서 박살됐다. 본래 집에도 갈 수 없고 친정에서도 쫓겨난 부인 김씨는 할 수 없이 충청도 서재필의 옛 본가를 찾아갔다. 서재필의 생모와 만난 김씨는 관노사령들이 근처에 당도했다는 얘길 듣고 성주 이씨와 마주보고 음독했다. 시어머니는 곧 사망했지만 김씨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맸다<ref name="songgun109"/><ref>일설에는 생모 성주 이씨와 부인 광산 김씨가 관비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정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ref><ref>부인의 묘소는 충남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합장되었다.</ref>. 이들 부부에게는 젖먹이 아들이 있었는데, 일설엔 나라에서 굶겨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김씨 시체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퍼진 독이 젖에 스며나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은진면 친아버지 집에 같이 살던 그의 서모 역시 관비가 됐다.
양아버지 서광하는 양아들이 역적이 되자 급히 서재필을 파양<ref>파양: 입양을 취소하고 부자지간의 연을 끊는 것</ref>하겠다고 선언하고 서재필의 부인 광산 김씨와 젖먹이 애기를 집에서 쫓아냈다(양어머니 안동 김씨는 이미 이전에 자연사). 서재필을 파양하는 조건으로 목숨만은 부지한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재산이 몰수되고 관노가 됐다. 한편 부인 김씨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친정에서도 출가외인이라며 문전박대했다.<ref name="songgun109">송건호, 《송건호전집 12》 (한길사, 2002) 109페이지</ref> 장인 김영석은 안그래도 집안이 풍비박살 날지 모르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신 딸에게 시집으로 돌아가 이걸 쓰라며 독약 한 첩을 들려 다시 돌려보냈다.<ref name="songgun109"/>
 
종로 화동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옆집이던 김옥균의 집과 함께 적몰됐다(두 집터는 합쳐져 [[관립한성고등학교]]의 부지가 된다.<ref>[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02/2006100200002.html <nowiki>[</nowiki>역사속의 오늘<nowiki>]</nowiki> 한국 최초 관립중학교 개교 (1900.10.3)] 조선일보 2006.10.02</ref>). 담양살던 누나만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했다. 같이 정변에 참가했던 친동생 [[서재창]]도 곧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가 처형됐다.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함경도로 피신해서는<ref name="KK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81129&CMPT_CD=P0001 내 외할머니는 서재필 박사의 동생이었다 - 오마이뉴스] 2010년 6월 5일자</ref>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양아버지 서광하는 전재산이 몰수되고 관노가 됐고 막내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 죽음만은 면하고 어린 부인과 함께 관노가 됐다.<ref>황현, 《매천야록》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6) 111페이지</ref> 훗날 서재필과 함께 동시에 사면됐다.<ref>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7페이지</ref>
친정에서도 쫓겨난 부인 김씨는 할 수 없이 충청도 서재필의 옛 본가를 찾아갔다. 서재필의 생모와 만난 김씨는 체포사령들이 근처에 당도했다는 얘길 듣고 성주 이씨와 마주보고 음독했다. 시어머니는 곧 사망했지만 김씨는 못다 죽어 대청 대들보에 목을 맸다<ref name="songgun109"/><ref>일설에는 생모 성주 이씨와 부인 광산 김씨가 관비로 끌려갔다가 이듬해 정월에 자살했다는 설도 있다</ref><ref>부인의 묘소는 충남 연무읍 죽평리 어머니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구자곡면으로 이장된 뒤, 서재필의 유골이 봉환되어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자 [[1995년]] 합장되었다.</ref>. 이들 부부에게는 젖먹이 아들이 있었는데, 일설엔 나라에서 굶겨죽였다고도 하고, 아이가 굶주림에 지쳐 김씨 시체의 젖을 물었는데 어머니 몸 속에 퍼진 독이 젖에 스며나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은진면 친아버지 집에 같이 살던 그의 서모 역시 관비가 됐다.
 
결국 살아남은 가족은 양아버지와 서재필의 친형의 유복자인 서재춘의 아들들, 그리고 이복형 서재창의 어머니인 서모와 유복자 서희원이 목숨을 부지했다. 또 관노가 된 막내동생 서재우 부부와 조카 서호석도 살아남았다.<ref>후일 서재창이 1885년생이라는 진술을 한 것이 서호석이었다.</ref> 그리고 담양에서 화를 모면한 큰 누나와, 피신한 여동생인 서기석도 겨우 화를 면했다. 서재필의 친구들도 목숨만은 부지했으나 투옥돼 심한 고문을 당했다<ref name="sss1"/>. 서재필의 친모 성주 이씨의 친정인 전라도 가내마을의 외가 친척들도 떨어야 했다. 서재필의 일가족 몰살 소식을 듣고 혹시나 의금부 도사들이 사약 사발을 들고 나타나지 않나 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한참을 전전긍긍했다 한다. 서재필이 역적이 된 후 대구 서씨들은 스스로 광(光)자 대신 병(丙)자 돌림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 돌림으로 바꿨다.
종로 화동<small>(오늘날의 삼청동)</small> 1번지에 있던 그의 집은 옆집이던 김옥균의 집과 함께 적몰됐다(두 집터는 합쳐져 [[1900년]] [[관립한성고등학교|경기고등학교]]의 부지가 된다<ref>[http://kid.chosun.com/site/data/html_dir/2006/10/02/2006100200002.html <nowiki>[</nowiki>역사속의 오늘<nowiki>]</nowiki> 한국 최초 관립중학교 개교 (1900.10.3)] 조선일보 2006.10.02</ref>). 담양살던 누나만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화를 모면했다. 같이 정변에 참가했던 친동생 [[서재창]]은 곧 붙잡혀 [[의금부]]로 끌려가 처형됐고,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함경도로 피신해서<ref name="KK1">[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81129&CMPT_CD=P0001 내 외할머니는 서재필 박사의 동생이었다 - 오마이뉴스] 2010년 6월 5일자</ref>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후에 이씨 성을 가진 평민과 결혼했다. 막내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 죽음만은 면하고 어린 부인과 함께 관노가 됐다.<ref>황현, 《매천야록》 (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6) 111페이지</ref> 훗날 서재필과 함께 동시에 사면됐다.<ref>신정일, 《똑바로 살아라》 (다산초당, 2011) 327페이지</ref>
 
개화파와 아무 상관이 없던 서재필의 옛친구들도 투옥 후 심한 고문을 당했다<ref name="sss1"/>. 목숨만은 부지했다고 한다. 서재필의 친모 성주 이씨의 친정인 전라도 가내마을의 외가 친척들도 떨어야 했다. 서재필의 일가족 몰살 소식을 듣고 혹시나 의금부 도사들이 사약 사발을 들고 나타나지 않나 마을 어귀를 수시로 내다보며 한참을 전전긍긍했다 한다. 서재필이 역적이 된 후 대구 서씨들은 스스로 광(光)자 대신 병(丙)자 돌림을, 재(載)자 대신 정(廷)자 돌림으로 바꿨다.
 
==== 망명 생활 ====
===== 일본에서의 1년 =====
[[파일:Yoon01.jpg|thumb|left|140px|젊은 날의 [[윤치호]]]]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고<ref name="조병옥75">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5페이지</ref> [[12월 13일]] [[인천]]을 출발한 배는 다음 날 [[나가사키]]에 도착하였다. 배로 오는 내내 그는 혁명의 실패와 서툴렀음을 자책하며 대성통곡을 하다 실신했다. 도착 후에도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개월 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조선에서는 자객들을 보냈고, 할 수없이 그들은 일본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도쿄 근처의 판자촌 부락에 숨어 지냈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이 생활비와 음식과 옷을 지원했다. 정변 당시 일본의 지원이 약속과 달랐던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는 일이었으나 망명객이 된 입장에 별달리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1년간 이들 망명객을 놓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줄다리기는 계속됐다. 일본은 아직 청나라와 맞서기에는 국력이나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고, 10년 후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청을 꺾을 때까지 동북아 정세에서 이들의 존재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게다가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다는 국제 사회의 비난 때문에 이들의 존재가 더 부담이었다.<ref name="daum1"/> 일본은 당시까지의 모든 외국과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고 국가 헌법을 인정받기 위해 국제 사회의 시선을 특히 의식할 때였다. 특히 김옥균은 홋카이도에 유폐되기도 했다. 일본 정부의 박대에 분개한 그는 미국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했고 일본에 와있던 미국인 선교사가 써준 소개장만 믿고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 초기 미국 망명 생활 =====
[[1885년]] [[5월 26일]] 미국적 화물선 차이나 호를 타고 [[요코하마]]에서 출항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미국은 가난한 이민자에게 차가왔다. 외로움과 고독 속에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불이익과 차별을 당하는 것에 좌절하여 대인기피증이 생기기도 했다. 적응은 너무나 어려웠다. 이런 생활에 도저히 견딜 자신이 없었던 [[박영효]]는 도중에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광범]]도 얼마간은 [[언더우드]] 박사의 후원으로 뉴욕에 체류했으나, 결국 [[박영효]]의 뒤를 따라 일본으로 되돌아갔다.<ref name="조병옥75"/>
 
서재필은 부두 하역과 잡역, 청소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등 막노동을 마다치 않고 혼자 견뎌냈다.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고 그나마도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아사 직전 노숙에도 몰리며 그가 유일하게 기댄 것은 개화파 동지 [[윤치호]]였다. 마침 미국에 와있던 그는 선뜻 친구에게 생활비를 송금해주었다. 윤치호는 갑신정변 관련자는 아니나 개화파 출신이라 살해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다. 친구의 도움은 가뭄의 단비같이 고마운 것이었으나 매우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 그는 풍찬노숙을 피할 수 없었다.
[[파일:Yoon01.jpg|thumb|left|140px|젊은 날의 [[윤치호]]]]
서재필은 부두 하역과 잡역, 청소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 등 막노동을 마다치 않고 혼자 견뎌냈다. 손짓과 발짓으로 어렵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고 그나마도 정신병자, 부랑아로 몰려 쫓겨나기를 반복했다. 노숙에도 몰리며 그가 유일하게 기댄 것은 개화파 동지 [[윤치호]]였다. 마침 미국에 와있던 그는 선뜻 친구에게 생활비를 송금해주었다. 그의 동지 윤치호는 갑신정변 관련자는 아니나 신변의 위협은 마찬가지라 주소가 수시로 바뀌었다. 친구의 도움은 가뭄의 단비같았으나 매우 불안정하고 일시적인 것이라 그것만으로는 풍찬노숙을 피할 수 없었다.
 
처음 그는 막노동과 식당 서빙 아르바이트, 인쇄소나 가구점의 전단지 돌리기, 농장 노동 등의 일을 했다. 그러나 언어 장벽과 유색인종에 대한 차가운 시선 등은 그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 시골 헛간이나 변두리의 판자집을 전전해야 했는데 위생상태 때문에 감기나 옴같은 피부염, 동상에 자주 걸렸다. 그런 그는 [[감리교]] 교회의 도움을 받으며 믿음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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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문 고등학교 진학 =====
[[1886년1866년]] 그는 어려운 중에도 배움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ref name="조병옥75"/>. 미국 생활도 어느덧 1년을 훌쩍 넘길 무렵, 서재필은 교회를 통해 존 홀렌벡(John Wells Hollenbeck)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탄광업을 하는 대부호로 자선사업가였던 홀렌벡은 그에게 정식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싶다고 제안했다. 서재필은 홀렌백과 독지가들의 도움으로 미국 반대편인 펜실베이니아 윌크스 배리(Wilkes-Barre)로 갔다. 그곳에서 서재필은 해리 힐만 아카데미(Harry Hillman Academy)라는 명문 사립고에 진학해 교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공부하게 됐다.
 
그는 [[라틴어]], [[헬라어(그리스어|헬라어]]), [[수학]] 등 여러 과목에서 우등생이 되었고, 자신의 짧은 영어를 빨리 극복하기 위해 [[웅변]]을 배울 생각까지 했다. 열심히 한 덕분에 웅변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졸업식에서는 대표로 고별 연설도 하였다. 교장댁에는 교장의 장인도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서 미국의 역사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기독교의 박애주의와 서구 인권사상 및 민주주의에 대해 개념을 잡기 시작했다<ref name="dong12"/>. 나중에 서재필은 스스로 [[갑신정변]]을 반성하면서 일반 민중의 지지를 생각하지 않았고 외세를 너무 쉽게 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이같은 인식은 이 때부터 싹튼 것이었다. 이 때부터 자신의 이름을 미국식인 필립 제이슨(Philip Jason)으로 쓰기 시작했다.<ref name="조선닷컴" />
 
===== 의과대학 진학 =====
[[1888년]] 고3이 된 그는 야간반으로 바꿔 낮에는 [[워싱턴 D.C]]의 미육군 군의학 도서관에서 사서 보조원으로 일하며 학비를 모았다. 고교를가을에 졸업하자마자 야간워싱턴의 전문[콜롬비아 대학]]의 야간 대학인 커코런 칼리지(Corcoran Scientific School) [[물리학|물리학과]]에 입학, 1년간 자유전공으로 [[자연과학]]과 [[역사]] 교양 과목등 예과를과목등을 이수했다.
 
[[1889년]] [[6월]] 서재필이 예과를 마치고 라파예트(Lafayette) 대 입학허가를 받았다. 그러자 후원자인 홀렌벡이 그를 호출해서는 거기 가지말고 [[프린스턴 대학교|프린스턴]] [[신학대]]에 들어가서 조선 선교사가 되라고 말했다. 그것이 지원조건이었다. 역적 신분으로 도저히 조선에 가면돌아갈 잡혀수는 죽어야 하는없었던 서재필은 거절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는 혼자서 헤쳐나갈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사정을 들은 라파예트대 하트 교수의 도움으로 학교는학교를 다니게 됐다.
 
하루 3불의 품삯으로 유리창닦이 등 잡역 아르바이트를 했고 학교 채플에서 신앙심을 키워나갔다.<ref name="조76">조병옥 《나의 회고록》(조병옥, 도서출판 해동, 1986) 76페이지</ref> 그러나 서재필은 아르바이트로는 생활과 학비가 동시에 해결이 안돼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워싱턴 미육군 의학박물관에서 동양 의학서들을 영어로 초벌 번역했다. 서재필은 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콜롬비아 대학교|컬럼비안大]](Columbian University, 현 [[조지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의과대학 야간학부에 입학했다. 그는 그동안 모은 돈으로 문방구를 차려 다시 주경야독 생활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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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사 면허, 미국 시민권 획득과 결혼 ====
[[파일:Seo Jp of Graduation to Columbia University in the City of New York, 1892.jpg|thumb|left|180px|1892년 콜럼비안 대학 졸업 사진]]
[[1890년]] [[6월 10일]] 의대 예과를 다니던 그는 미국에 정식으로 귀화하여 한국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다.<ref name="조선닷컴" /> 이듬해 의대 예과를 마친 서재필은 본과로 진학해 의사 고시를 준비했다. 당시 미국의 교육 사정으로는 유태인 및 유색 인종은 의대 진학 자체를 하기 힘들었는데 그는 매우 운이 좋았다. [[1892년]]엔 가필드 병원(Garfield Hospital)에서 1년간의 인턴 과정을 거쳤다. [[1893년]] 콜럼비안大 야간부 차석으로 졸업 후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M.D.)가 되고 의사 면허를 받었다. [[세균학]] 전공이었다. 훗날 그를 다들 서재필 박사라 부른 것은 학위 때문이 아니라 닥터를 직역해 [[박사]]라 부른 것 뿐이다.<ref name="dong12"/> 졸업후 바로 모교의 조교가 되었다. 그러나 인종차별로 인한 일부 학생들의 반발로 1년만에 그만뒀다.
[[파일:James Buchanan.jpg|thumb|right|130px|[[제임스 뷰캐넌]]<br />박애주의자이며 인종차별을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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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 계몽 운동 ====
===== 귀국 직후 =====
그는 아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조선 조정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고 믿어서도 안됐다. 그는 철저히 미국인으로 행동함으로서 신변의 안전은 물론 조선 정세에 대한 발언권을 크게 할 수 있다고 봤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거의 [[영어]]로 대화했고 자기의 이름도 절대 본명으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 부르게 하고 서명에도 절대 본명을 쓰지 않았다. 특히 고종과 조정 대신 앞은 물론 대중 앞에 나설 때도 영어만 썼다. 귀국 직후 영어 연설에서, [[조선]]이 [[단군]] 이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자주국임에도 역사적으로 우리는 역대 중국 왕조의 식민지 노예와 다를바 없었고 [[조선]]이 살 길은 [[청나라]]로부터 독립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그의 개화파 동료이자 내무협판 [[유길준]]의 초빙형식으로 조선에 귀국했다<ref name="omay080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3048</ref>. 서재필의 귀향은 원치않게 장안의 화젯거리가 됐다. 이는 그의 부인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선 서양 사람을 본다는 일 자체가 드물었다.<ref name="yijong42">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급진주의에서 기독교 입국론으로》(배재대학교출판부, 2005) 42페이지</ref> 당시 25세였던 그의 부인은 키가 왠만한 당시 성인 남성보다 큰 172센티에 달했고 흰 피부에 머리가 갈색으로 당시 서울 시민들의 큰 관심을 모았다<ref name="yijong42"/>. 거의 190에 달하는 서재필의 키는 더 놀라웠다.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 사면복권된 그의 가족들이 찾아왔지만 그는 모른 척하였다. 죽은 전처와 생모 성주 이씨의 묘소의 위치도 들었지만 평생 가보지 않았고 옆에서 가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 이런 그의 행동은 절친 [[윤치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조선 조정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었고 믿어서도 안됐다. 그는 철저히 미국인으로 행동함으로서 신변의 안전은 물론 조선 정세에 대한 발언권을 크게 할 수 있다고 봤다. 귀국 직후부터 그는 꽤 오랜 기간을 거의 [[영어]]만 썼고 자기의 이름도 절대 본명으로 부르지 못하게 했다. 반드시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 부르게 하고 서명에도 결코 본명을 쓰지 않았다. 절친 [[윤치호]]는 그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모국어 따위는 잊었다고 차갑게 대꾸할 뿐이었다.
 
그의 귀국 소식을 듣고 사면복권된 그의 가족들이 찾아왔지만 그는 모른 척하였다. 앞으로 그가 하려는 일은 언제 다시 역적 신분이 될지 모르는 위험한 일들이었다. 자기가 잘못되면 가족들이 다시 죽거나 노비가 되고 죽은 처와 모친의 무덤이 파헤쳐진다. 그는 죽은 전처와 생모 성주 이씨의 묘소의 위치도 들었지만 평생 가보지 않았고 옆에서 가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 이런 그를 세간의 눈은 물론 절친 [[윤치호]]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인용문2|서재필은 [[갑신정변]] 사건으로 천민(賤民)이 되어 자살한 전처의 무덤을 찾아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거지꼴이 된 양부(養父)가 찾아오자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냉혹하고 거만한 사람이 되었다.|윤치호 일기 中}}
거지꼴로 양아버지 서광하도[[서광하]]도 그를 찾아왔지만 서재필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나 삭탈관작당하고 거지가 된 장인장모 내외는 모른말할 척으로것도 끝나지 않았다없었다. 서재필은 격렬하게 몸을 떨며 분명한 한국말로, '당신이 어떻게 나의 장인인가, 딸래미와 어린 외손을 외면한 금수(禽獸)에게 내가 왜 인사 하느냐'며 때려 내쫓았다. [[윤치호]]는 곁에서 벗의 행동을 불편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10년만에 입궐해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하는 자리는 더 가관이었다. 다음은 매천야록의 기록과 윤치호의 일기 내용이다.
 
{{인용문2|서재필은 [[미국]]에 살면서 본국에 있는 본처와 헤어지고 [[미국]]여자와 결혼했다.<ref>그러나 본처 광산김씨는 그의 출국 후 자결했다.</ref> 그는 [[갑오개혁|갑오년]]에 환국한 뒤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담배|궐련]](卷煙, [[담배]]의 번역음)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자기를 외신(外臣, 다른 나라의 신하)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매천야록]] 中, [[황현]]作}}
{{인용문2|그는 양복 차림으로 [[안경]]을 끼고 입궐하였으며, 입궐한 뒤에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앞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악수]]를 청하였다. 이를 본 [[조선]]의 조정 대신들은 충격을 받았고, 현장에서 이를 지켜본 [[박정양]], [[박영효]], [[김홍집 (1842년)|김홍집]], [[유길준]], [[윤치호]] 역시 경악했다. 영재 [[이건창]]은 이를 듣고 사람이 망가졌다며 그를 비난하였다.|윤치호 일기 中}}
당시도 상사나 연장자 앞에서 맞담배는 금기였다. 연장자나 상관 앞에서는 안경을 벗어야 예의였다. 하물며 임금의 앞에서랴. 서재필은 시종일관 절한번 하지 않고 뒷짐지고 짝다리를 짚었으며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담배를 꼬나문 채 면대하였다. 이는 착안경 함권연(着眼鏡含卷煙), 칭외신 부수이출(稱外臣 負手而出)이라 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아직 조정 신료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수구파 대신들이 특히 이를 갈았다. 특히 수구파 [[이범진]] 등은 거듭 상소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의 뒤엔 미국인이라는 후광과 개화파 동료들, 그리고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있었다.
 
===== 귀국 초기와 조선 정부 고문 =====
그는 정변의 실패를 고통스러워했고 조선 자체에 대해 냉랭해져서는 날카롭고 예민하게 굴었다. 그는 조선의 모든 존재와 대결할 기세였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용문2|그의 미국인 고우(故友)는 서재필과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걷어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윤치호 일기]] [[1898년]] [[1월 15일]]자}}
소송도 불사했다. [[1896년]] [[7월]] 당시 [[고등재판소]] 재판 기록에 따르면 원고 미국인 의사 피제선이 피고 정모씨가 올린 '가짜 상소'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금 2000원을 청구한 내용이 나온다.<ref name="dispps">[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377 "정혼녀 빼앗은 죄 1500냥 배상하시오"] -조선일보 2005년 9월 2일 기사</ref> 재판부는 “서재필을 상하게 하려던 정씨의 나쁜 마음이 드러났다”며 “피고 정씨는 손해배상금 1000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최고위 관직인 의정대신(議政大臣)의 연봉이 5000원<small>(현재 국무총리 연봉으로 미뤄 1억 2000만 원 쯤으로 추산)</small>이었던 걸로 미뤄볼 때 왠만한 당시 공무원들의 1년 연봉이었던 셈이었다.<ref name="dispps"/> 이는 [[조선]] 사회의 상식과 통념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탄핵 상소는 조선 시대 [[언론]]으로서, 의견이 있는 자들은 양반이라면 누구든 상대를 죽이라는 내용이든 역모를 한다는 내용이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권리가 있었고 임금이 상소를 물리치면 그걸로 그만인 일이었다. 아무리 고관대작도 자신에 대한 탄핵상소가 올라오면 일단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 반론을 제기하지 보복 목적으로 직접 실력 행사를 하는 법은 없었다.
 
===== 신문발행과 조선 정부 고문직 수락 =====
[[파일:Yu Kil-chun.jpg|thumb|right|200px|[[유길준]]]]
{{참고|청일전쟁|갑오개혁|을미개혁}}
그는 그의 개화파 동료이자 내무협판 [[유길준]]의 초빙형식으로 조선에 귀국했었다.<ref name="omay080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73048</ref> 당시 [[갑오경장]]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은 개화파들이 장악했었다. 갑신정변이 민중의 지지가 결여되었었다는 반성을 공유했던 개화파들은 민중을 계몽하기 위해 신문 창간이 절실했다. 당시 조선에는 일본인 [[아다치 겐조]]가 사장으로 있는 친일신문 한성신보가[[한성신보]]가 발행중이었고, 개화파들을 후원했던 일본 역시 개화파들의 신문 개설을 권고하는 바였다<ref name="omay0804"/>.
 
==== 민중 혐오와 합리주의적인 태도 ====
[[1896년]] [[1월]] 신문발행의 책임과 함께 10년 임기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장기체류가 될 것으로 생각했던 그는 우편으로 컬럼비안 의대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고 서울에서 공개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우리가 중국의 노예가 아닌데도 해마다 인삼과 황금, 석탄, 여성, 환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지적했다. 이어 연좌제와 고문 등 신체를 상하게 하는 악법을 폐지할 것과, 문벌과 집안을 살피지 말고 인재를 등용할 것, [[과거 제도]]에 양민 응시가 가능하다는 것은 말뿐이라면서, 가난한 농사와 기술에 종사하는 평민들 중 똑똑한 자제들에게 조정에서 비용을 들여 인재로 기를 것을 건의하였다.
서재필은 [[갑신정변]]의 실패 이유를 '개화파들의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배일을 부르짖으며 반대하는 민중의 무지와 몰각때문'이라 하였다. 그는 [[갑신정변]] 직후의 쓰라린 기억을 생각하는 것을 고통스러워했고, 오히려 냉정해지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윤치호]], [[유길준]], [[박정양]], [[이상재]]를 비롯한 동지들과 다른 [[조선인]]들에게 반감과 거부감을 주게 된다. 한편 그는 다른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히 냉담하게 대하였다.
 
{{인용문2|그(서재필)의 [[미국인]] 고우(故友)는 그와 함께 거리를 걷다가 그가 가까이 오는 거지를 발길로 걷어차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윤치호 일기]] [[1898년]] [[1월 15일]]자}}
===== 의회 설립 준비 =====
미국에서 의회 제도에 대해 특히 많이 고민했던 서재필은 조선 정부 고문 자격으로 의회 설치를 주장했다. 일리가 있다 판단한 개화파 내각은 황제가 임명한 의원 일부와 국민 대표자로 구성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을 본격 [[국회]]로 개조할 계획을 짰다. 이는 서구나 일본의 의회제도와 달랐고 일본과 조율된 바도 아니어서 갑작스런 정부 개편에 놀란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코무라]]가 면회를 신청했다<ref>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 2007) 32페이지</ref>.
 
그의 [[미국인]] 친구와 함께 [[한성]]을 다니던 중 [[미국인]]이 구걸하러 오는 [[조선인]] 거지를 발로 걷어차고 모욕을 해도 그는 이를 지켜보면서 못본 척 방관하였다. [[영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태도를 의문스럽게 여긴 친구 [[윤치호]]는 왜 [[영어]]만 쓰느냐고 물었고 그는 모국어를 거의 잊어버렸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이를 알던 [[윤치호]]는 '나는 서재필이 쓰거나 말하는 모든 것에 걸쳐 모국어를 거의 잊어 버렸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인용문2|제이슨 박사, 외무협판으로 부를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고문관으로 부르니 귀국하였소. 무슨 까닭이오?<ref name="hwang33">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 2007) 33페이지</ref>}}
{{인용문2|난 미국인이오. 일국의 관료가 외국인이라면 세계 문명인들이 모두 비웃을 거 아니오? 정부 고문이라면 늘 외국인이 맡아왔으니 격식에 맞소.<ref name="hwang33"/>}}
코무라는 중추원을 바꾸는 목적이 무엇인가 물었다. 서재필은 자기는 중추원 고문으로서 법률 제정과 심의를 하는 인력들을 키울 것이다라고 밝혔다<ref name="hwang33"/>. 코무라는 일본조차 [[후쿠자와 유키치]]의 민권 운동과 의회 제도 도입이 일황에 대한 반역으로 오해됐었는데 하물며 조선이겠느냐 되물었다. 그러자 서재필은 이렇게 답했다.
 
[[1896년]] [[7월]] 그는 [[한성]]에 사는 [[진사]] 정모를 고소하였다. [[1896년]] [[7월]] [[고등재판소]] 판결문에 '한성에 사는 미국 의사 서재필'이 원고로 등장한다. 서재필은 진사(進士) 정모씨가 올린 ‘거짓 상소(上疏)’ 때문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손해배상금 2000원을 청구한 사건이다.<ref name="dispps">[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377 "정혼녀 빼앗은 죄 1500냥 배상하시오"] 조선일보 2005.09.02</ref> 재판부는 “서재필을 상하게 하려던 정씨의 나쁜 마음이 드러났다”며 “피고 정씨는 손해배상금 1000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 국무총리)의 연봉이 5000원(현재 1억 2000만원)인 점에 비추어 손해배상금은 요즘 돈으로 2400여만원 정도의 고액인 셈이다.<ref name="dispps"/> 이는 또한번 [[조선]]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와 [[조선]]에서는 명예를 중시 여겨, 탄핵 상소가 사실여부를 떠나 자신에 대한 탄핵상소가 올라오면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거나 반론을 제기하였지, 자신을 탄핵한 사람을 고소하는 일은 없었다.
{{인용문2|틀렸다. 당신도 미국에 유학해봤으니 알 것이다<small>(코무라 일본공사는 [[하버드 대학교|하버드]] 출신)</small>. 법률과 정책은 공론장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져야 한다. 정부는 법률 제정의 의미를 충분히 국민에게 알리고 반대하는 국민들은 법률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험이 쌓이면 훌륭한 법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반대측의 명분도 사라진다. 이번 [[단발령]]만 해도 아침에 법안을 만들고 반나절 지나 선비의 상투에 가위를 들이대니 누가 이해하겠는가?<ref name="hwang34">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 2007) 34페이지</ref>}}
코무라는 일본이 조선의 근대화를 전심으로 돕고 있으니 괜한 시행착오말고 그냥 일본의 제도와 법률을 그대로 도입하라 조언했다. 서재필은 갑신정변 때 일본의 짓거리를 몸소 당해봤기 때문에 일본이 조선의 개화를 돕는다는 말에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ref name="hwang33"/>.
 
==== 조선정부 고문 취임 ====
{{인용문2|고맙기는 한데,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 이런 난리<small>(을미의병을 말함)</small>가 일어나는 것 아닌가. 반감만 부르고 수구파들에게 공격의 빌미만 제공했을 뿐.}}
[[1896년]](고종 33년) [[1월]] [[김홍집 내각]]으로 부터 10년 임기의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동시에 평민들에 대한 교육, 계몽활동과 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어 [[유길준]]에게 신문간행계획을 알리고 협조를 구하였다. 이어 [[1월 19일]] [[한성부]]에서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장기체류를 결심하고 우편으로 [[컬럼비아 대학]] 의과대학의 [[세균학]] 강사직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그는 [[유길준]], [[박영효]], [[박정양]] 등을 만나 '[[조선]]이 [[근대화]]를 하려면 반드시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우리가 중국의 노예가 아닌데도 [[중국]]에 해마다 [[인삼]]과 황금, 석탄, 여성, [[환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 독립신문 창간 =====
 
[[유길준]]과 [[박영효]] 등의 적극적인 후원과 주선으로 쉽게 [[조선]]에 입국할수 있었으며, 10년 계약으로 월급 3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취임하였다. 당시 환율은 원과 달러가 같았으며 [[미국]]에서 받는 월급은 100달러였다. 귀국 직후 그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찾아가 연좌제와 고문 등 신체를 상하게 하는 악법을 폐지할 것과, 문벌과 집안을 살피지 말고 인재를 등용할 것과, [[과거 제도]]에 평민들도 응시할 수 있지만 가난한 농사와 기술에 종사하는 평민 자제들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점을 들어 조정에서 비용을 들여 인재를 기를 것을 건의하였다.
 
서재필이 처음 귀국했을 때 [[윤치호]]는 [[춘생문 사건]]에 가담했다가 체포대상이 되어 [[미국]][[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서재필은 두문불출하던 [[윤치호]]를 찾아 정세에 대해 자문했고, [[윤치호]]는 선배 서재필의 공백기에 [[조선]] [[정세]]를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동시에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기도 했다.<ref name="황293">이황직, 《독립협회 토론 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웅진), 2007) 93페이지</ref> 서재필이 귀국하자 정부의 외척 고관들은 그가 [[갑신정변]]으로 동료들이 처형당하고 가족까지 연좌된 것에 원한을 품고 자신들에게 보복할 것을 우려, 서재필을 제거하려 했다. 그가 [[미국]]과 외국의 힘을 빌어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 한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이를 서재필에게 알려주고 각별히 조심할 것을 부탁했다. 서재필은 곧 [[미국]]인 경호원들을 대동하였다.
 
서재필의 귀향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는데, 이는 특히 그가 서양인 부인을 데리고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서양 사람 을 본다는 일 자체 가 아주 드물게 있는 기이한 일이었다.<ref name="yijong42">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급진주의에서 기독교 입국론으로》(배재대학교출판부, 2005) 42페이지</ref> 거리에 백인 여자가 나타나기만 해도 구경꾼이 모여 들었을 터인데, 서재필이 서양 여자와 결혼했고, 또 그 여인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하니 관심 을 모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25살인 서재필 부인은 키가 충천하고 1미터 72센티, 피부가 희고, 머리가 갈색 이었으니 장안이 떠들썩 할 수밖에 없었다.<ref name="yijong42"/>
 
==== 의회 설립 준비 ====
서재필은 황제가 임명한 의원 일부와 국민 대표자로 구성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을 본격 [[국회]]로 개조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주조선일본공사 코무라는 중추원 고문이 된 서재필에게 사람을 보내 면회를 신철했다.<ref>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 2007) 32페이지</ref>
 
{{인용문2|제이슨 박사, 외무협판으로 부를 때는 귀국하지 않더니 고문관으로 부르니 귀국하였소. 무슨 까닭이오?<ref name="hwang33">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 2007) 33페이지</ref>}}
{{인용문2|비록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미국인이오. 미국인이 조선의 관료를 맡는다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비웃을 것이오. 반면에 [[조선]]의 고문은 늘 외국인이 맡아 왔으니 격식에 맞는 것 아니오?<ref name="hwang33"/>}}
 
코무라는 그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중추원 고문으로 응당 할 일을 할 것이다. 법률 제정과 심의를 하는 인력들을 키울 것이다.<ref name="hwang33"/>"라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그러나 코무라는 [[일본]]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민권 운동과 의회 설립 움직임을 천황 폐하에 대한 반역으로 해석, 곡해하는데 [[조선]] 백성들이 의심하지 않겠느냐고 밝혔다. 코무라는 백성들이 곡해할 것이라며 서재필이 실패하리라고 전망했다.
 
{{인용문2|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무지한 백성들은 반발하기 마련이지요.<ref name="hwang33"/>}}
{{인용문2|그렇지 않아요! 당신도 [[미국]]에서 배웠으니 잘 알 것이오. 법률과 정책은 제정 전부터 공론장의 토론을 통해 만들어져야 합니다. 토론을 통해 정부는 법률 제정의 의미를 충분히 국민에게 알리고 반대하는 국민들은 법률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개선점을 제시할 수 있소. 이런 과정이 몇 차례 계속되었을 때 비로소 국민의 뜻을 반영한 훌륭한 법이 만들어질 뿐만 아니라 반대 측의 불만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이번 [[단발령]]만 해도 그렇소. 그것이 좋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소? 그렇다고 아침에 법안을 만들고, 반나절 지나 선비의 상투에 가위를 들이대서야 어디 찬성하는 사람 조차 주위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소?<ref name="hwang34">이황직, 《독립협회 토론공화국을 꿈꾸다》 (프로네시스, 2007) 34페이지</ref>}}
 
코무라는 "여기는 조선이지 미국이 아니다.<ref name="hwang34"/>"라며 염려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나는 중추원 고문으로서 법률 제정과 심의를 잘 할 수 있는 인재들을 길러낼 것이오. 그러기 위해 교육을 할 것이고, 교육을 위한 모범으로 토론을 가르칠 작정이오.<ref name="hwang34"/>"라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교육과 토론을 통해 깨닭은 국민들이 다음 세대 에는 분명 [[민주주의]]를 작동할 만큼 지적으로 성숙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서재필은 [[일본]]이 조선의 개화를 돕는다는 것에도 회의적으로 봤다.
 
{{인용문2|조선의 개화를 위한 법률을 만드는 일은 우리 일본이 지금도 잘 돕고 있소. 아무래도 전통과 문화가 비슷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조선이 시행착오를 줄이고 빠르게 개화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좋소.<ref name="hwang33"/>}}
{{인용문2|고맙기는 한데, 당신들이 하라는 대로 했다가 지금과 같은 난리(을미의병)가 일어나는 것 아니오?<ref name="hwang33"/>}}
 
서재필은 외국 세력이 중심이 되는 개혁은 오히려 반감만 초래하고 국수주의자들에게 좋은 공격의 빌미만 제공할 뿐이라고 반박하였다.
 
==== 조선 정부 고문과 계몽 활동 ====
==== 관직 거부와 독립신문 창간 준비 ====
{{참고|독립신문}}
[[파일:독립신문.jpg|thumb|독립신문 초판]]
[[파일:Yun Chi-ho's 42 year's old.png|thumb|left|170px|친구이자 정치적 동지인 [[윤치호]]]]
그는 독립협회와 정부에서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ref name="daum1"/>받아 신문 창간을 준비했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고 자기 자신도 월 300원씩의 중추원 월급을 다 쏟아부었다.<ref name="omay0804"/> 이어 그는 내무협판 [[유길준]]과 교섭, 5천원의 추가 지원 비용을 얻어내 [[독립신문]]을 창간을 성공시킨다.<ref name="kiristan">김경, 《한국 기독교 건국공로자열전》 (한국문학도서관, 2008) 153페이지</ref> 그는 발간사에서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정부가 인민의 재산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건부로 인민이 조정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아직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백성들에겐 괴이한 소리에 불과했다.
 
[[1895년]] [[12월]] 중순에 그가 귀국한 직후부터 시도했던 [[신문]] 간행이 [[일본]]에 의해 좌절될 뻔했을 때 서재필의 상심을 들어주던 유일한 대화 상대는 [[윤치호]]였다.<ref name="황293"/> [[윤치호]]는 [[아관파천]] 직후 신문 간행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서재필을 돕고 싶었지만, 이미 [[민영환]]을 수행해 [[러시아]]에 다녀오라는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명을 받았기에 도울 수 없었다.<ref name="황293"/> [[1895년]] [[유길준]]은 그에게 벼슬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사양하였다. '[[갑신정변]]이 민중에 뿌리를 박지 못해서 실패했다'고 느껴 민중 계몽 사업을 하겠다며 조용히 거절했다. 바로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그는 절하지 않고, 안경을 쓰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팔짱을 낀 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물음에 그대로 말대답을 하였는데 이는 임석한 조정 대신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이범진]] 등은 이를 계속 소문을 내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매천 [[황현]] 역시 같은 기록을 남겼다.
 
{{인용문2|서재필은 [[미국]]에 살면서 본국에 있는 본처와 헤어지고 [[미국]]여자와 결혼했다.<ref>그러나 본처 광산김씨는 그의 출국 후 자결했다.</ref> 그는 [[갑오개혁|갑오년]]에 환국한 뒤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담배|궐련]](卷煙, [[담배]]의 번역음)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외신(外臣, 다른 나라의 신하)을 칭했다. 이에 조정이 온통 분노했다|[[황현]], [[매천야록]]}}
 
당시 [[조선]]과 [[대한제국]]은 상사나 연장자 앞에서는 [[담배]]를 피워도 안되었고, 연장자나 상관 앞에서는 [[안경]]을 끼는 것도 불경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서재필은 시종일관 절한번 하지 않고 뒷짐진 채 짝다리 짚고,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 앞에서 손가락 [[담배]]를 핀 채 면대하였다. 이는 착안경 함권연(着眼鏡含卷煙), 칭외신 부수이출(稱外臣 負手而出)이라 하여 당시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서재필은 곧 [[외무부]] [[협판]](지금의 [[외교부]] [[차관]])자리를 제수받았으나 거절하고, 형식적으로만 [[대한제국 정부]]의 고문 겸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인이기 때문에 수락할 수 없다고 하여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관]] 자리를 주었으며, 신문 창간을 할 수 있도록 국비를 지원했다.<ref name="omay0804"/> [[개화파]]정부는 개화인사 중 몇안되는 지도자인 서재필을 [[외무부]]협판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서재필은 보수파와 민씨 척족들로부터의 만약의 방해와 모략에 대비하기 위해 권력의 내부에 들어가기보다는 권력의 외부에서 안전한 미국시민으로 민중을 계몽<ref name="daum1"/>하려고 하였다. 그의 포부를 본 [[박영효]]는 5천 원의 자금을 지원하기로 약속했으나 약속은 [[박정양]] 내각이 들어선 뒤에 이행되었다.
 
대신 그는 개화파 정부와 [[근대화 운동]]의 한 방편으로 [[신문]]의 발간을 합의하고 신문 창간의 자금과 생활비를 지원<ref name="daum1"/>받아 활동하였다.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점과 민씨 내각의 반대를 잘 알던 그는 [[내각]]에 입각하는 대신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직]]으로 돕겠다고 하여 개화파 정치인들을 일단 안심시킨다. 신문 창립 비용으로 국고에서 3천원과 정착 자금으로 1400원 등 4400원을 받았고, 월 300원씩 10년간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고문직]]을 맡기로 한 것이었다.<ref name="omay0804"/> [[1896년]] [[1월]]에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다. 귀국 직후부터 [[신문]]은 계몽의 한 방법이라는 [[유길준]]의 설명을 듣고, 그는 신문 발간을 준비해 왔고, 국내 온건 개화파의 각종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정부의 재정지원, 일부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성금 모금 등으로 그는 신문을 발간하게 되었다.
 
이어 그는 내무대신 [[유길준]]과 교섭, 5천원의 추가 지원 비용을 얻어내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ref name="kiristan">김경, 《한국 기독교 건국공로자열전》 (한국문학도서관, 2008) 153페이지</ref> 그는 [[사회계약론]]을 소개하며 조정이 인민의 재산과 행복을 지켜주는 조건부로 인민이 조정에 충성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당연시 여기던 당시의 백성들은 그가 소개한 [[사회계약론]]을 사회를 혼란으로 몰고 갈 괴상한 신사상 정도로 취급하였다.
 
===== 아관파천 전후 =====
[[파일:One of the Dokliphyuphoe.jpg|thumb|left|독립협회에 모인 민중들]]
{{본문|아관파천}}
한편 귀국 직후 그는 부패한 외척 출신을 관리로 중용하고 무속인을 신봉했던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멸했다. 또한 수구파 대신들의 탐욕과 비리를 거침없이 질타, 지적하는 한편 참정권을 그릇된 것으로만 이해하고, [[갑신정변]]에 부정적이었던 민중들에 대한 혐오와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다. [[윤치호]]에 의하면 서재필은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조선]] 사람을 [[어린애]]나 [[미개인]] 다루듯이 하여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미국인]]이어서 다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인용문2|서재필은 매사에 지시하기를 좋아하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정력적이고 단호하고 기민했다. 원로 대신, 젊은 관료 할 것 없이 마치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 말하거나 다루었으나 이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윤치호 일기}}
 
[[윤치호]], [[유길준]]은 그에게 시정과 자제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서재필의 말을 듣고 깊이 공감하는 점을 느끼면서 훈계를 그만둔다. [[미국]]공사관 공사 [[알렌]]은 그에게 분노하더라도 겉으로는 웃으며 좀 외교적인 태도를 가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고국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이상재]], [[윤치호]], [[이승만]], [[남궁억]]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시민단체인 [[독립협회]]를 만들고 그 첫 사업으로는 독립문 건립 계획을 수립한다. 그는 또 [[조선 고종|고종]]에게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자주권을 주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독립협회]]의 동지들에게도 [[조선]]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민족이며 [[청나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국가를 이루자고 주장하였다. '어서 빨리 청나라와 결별해야 된다. 그게 이 나라가 사는 길이다. 그리고 고루한 [[중국]] 서적과 [[유교]] 서적은 쓰지 말아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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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훈 경력 ==
* [[1945년]] [[미국]] 국방성 표창장 (2차 세계대전 참전 공로)
* [[1977년1970년]] [[12월 13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훈 1등)
* [[1997년]]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독립장]] 추서
 
== 학위 ==
* [[코크란 단과대학]] 물리학과 졸업(전문학사)
* 커코런 전문대학 물리학 예과 이수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의과대학 [[세균학과]] 졸업([[세균학]] 학사)
* [[시카고 대학교]] 명예[[철학]][[박사]]<ref>조선통신사, 《조선연감 47》 (조선통신사, 1946) 365페이지</ref> <ref>조선통신사, 《1948년판 조선연감》 (조선통신사, 1948) 466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