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성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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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군 이미'''(福城君 李嵋, [[1509년]] [[9월 28일]]([[음력 9월 15일]])<ref>《조선왕조실록》 중종 9권, 4년(1509년) 9월 15일 3번째기사</ref> ~ [[1533년]])은 [[조선]]의 왕족으로, 조선 제11대 임금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이자 장남이다. 생모는 [[경빈 박씨 (중종)|경빈 박씨]](敬嬪 朴氏)이며, 정부인은 군부인 [[파평 윤씨]](郡夫人 坡平尹氏)이다. [[본명]]은 미(嵋), 성은 [[전주이씨|이]](李), 본관은 [[전주이씨|전주]](全州),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 생애 ==
[[1509년]] [[9월 28일]]([[음력 9월 15일/양력 9월 28일 ]])(金)에 당시 숙의였던 박씨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이름은 학수(鶴壽)이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26권, 11년(1516년) 11월 15일 5번째기사
</ref> 본래의 작호는 서성군(瑞城君)이었으나 1517년 복성군으로 개봉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중종 28권, 12년(1517년) 6월 28일 3번째기사</ref> [[장경왕후 (조선)|장경왕후]]가 세자를 낳고 죽은 뒤 경빈 박씨는 아들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야망을 가졌다. 마침 1527년 세자의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경빈 박씨가 혐의를 받아 작호를 빼앗기고 폐서인이 되어 [[상주]]의 본가로 내쳐졌다. 1533년 어머니 경빈 박씨가 사사된 뒤 조정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복성군의 제거를 주장했으며 이를 거부하던 중종도 결국 복성군의 사사 주청을 받아들였다.<ref name="sillok74">《조선왕조실록》 중종 74권, 28년(1533년) 5월 26일 5번째 기사</ref> 복성군이 사사된 뒤, 두 누이 혜순옹주와 혜정옹주도 작호가 박탈되어 폐서인되었으며 혜순옹주의 남편 광천위 김인경은 유배되었다.<ref name="sillok74"/> 하지만 [[김안로]]의 아들 [[김희 (조선)|김희]]가 사건을 조작한 진범으로 밝혀져 다시 복직되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9999_1_0005222&curSetPos=0&curSPos=0&isEQ=true&kristalSearchArea=P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복성군]</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