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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8년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세조의 능 자리를 간택하는 간심관의 한 사람으로 전국을 다녀왔으며, 원상의 한 사람으로 예종 초반의 정사에 참여하였다. 이때 장기간 그가 병권을 쥐고 있었다는 이유로 겸임 병조판서직에서는 해임되었다.
 
1469년(예종 22년) 보국숭록대부로[[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가 그해에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으로 승진하고 편집중인 경국대전을 집대성하였다. 1470년(성종 2)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성종의 지지를 즉위한 공로로 1471년에는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 1등에 녹선되었으며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성종 즉위 초반에 그는 법전과 형전의 편찬, 정리에 참여하였다. 이후 영중추부사를 거쳐 1478년 다시 우의정에 올랐으나 일부 관료들의 반대로 곧 사직하였다
 
[[1480년]](성종 10년) [[11월 11일]] [[연산현]] 자택 정침에서 병으로 사망항였다. 근처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1481년]] [[2월]]에 연산현 동촌 왕대리에 장사하였다.
 
=== 사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