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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일진회의 병합 촉진 운동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일진회는 지속적으로 한일합병을 탄원하였으나 이는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당시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의 의사를 왜곡한 것에 불과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면서 이토의 동양평화론이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 국가를 침략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거짓 평화론이라 주장하였다. 게다가 병합 가속화시에 주도권을 잃는 것을 우려한 이완용 내각도 일진회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에 일진회는 [[12월 4일]]에 [[일한합방성명서]]를 발표하고, 한국 황제와 총리대신, 통감에게 합방청원서를 전달했다.
[[1910년]] [[5월 30일]]에 일제는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한국통감으로 겸임시키고, 한국 병합을 진행시켰다. [[6월 30일]]에는 유명무실하던 한국 경찰을 일본 한국주재군 헌병대에 통합시켜 폐지하였다. [[7월 23일]]에 한국에 도착한 데라우치는 [[8월 16일]]에 이완용과 함께 병합 조약 체결을 진행시켰다. [[8월 18일]]에는 별다른
== 역대 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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