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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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입학 ===
그 후 이휘소는 [[대한민국의 검정고시|검정고시]]를 치뤄 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입학 시험을 통해 1952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당시 서울대학교는 부산시지금의 대신동의부산광역시 서구 대신동에 해당하는 지역의 가건물로 옮겨 와 있었고있었는데, 서울대학교만 따로 있지 않고 〈전시 연합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국의 모든 대학교가 한 곳에 모인 상황에서 수업만 학교별로 따로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서울대학교는 서울대한민국군이 수복서울을 후에수복한 이후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ref group='주'>구 경성여자사범학교 부속 여자국민학교</ref> 자리에 임시 교사를 세웠다가 이내 미군 철수 이후에 태릉으로 옮겨갔다. 이휘소는 한 방에 10명씩 수용하는 임시 기숙사에서 자취생활을 시작하였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한 학기 수업을 받은 후, 이휘소는 물리학에 큰 흥미를 느꼈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시도하였다.<ref name="lhs"/>
 
=== 미국 유학기 ===
하지만 서울대학교는 그가 당시 재학중이던 공과대학 화학공학과에서 문리과대학 물리학과로의 전과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는 학교 수업과는 별도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고는 있었지만, 수차례에 걸친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 큰 실망을 하고 있던 중에, 마침 한국전 참전 미군 장교 부인회의 후원을 받는 유학장학생에 선발되었다. 이에 그는 좋아하는 물리학을 실컷 공부하지 못하게 하는 서울대학교를 과감하게 박차고 나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하였다. 그가 편입할 대학교는 [[오하이오 주]] 옥스퍼드 시의 [[마이애미 대학교 (오하이오 주)|마이애미 대학교]]로 결정되었다. [[1955년]] [[1월 26일]] 아침에, 이휘소는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다.<ref group='주'>당시에는 제트기가 보급되지 않았기에 그가 탄 것은 프로펠러 비행기였다.</ref> 그는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시카고]]를 경유하여 [[1월 31일]]에야 겨우 목적지 [[마이애미 대학교에대학교 (오하이오 주)|마이애미 대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ref name="lhs"/>
 
이휘소는 [[1955년]] 1월에 [[오하이오 주]] [[마이애미 대학교 (오하이오 주)|마이애미 대학교]] [[물리학]]과에 편입하였다. 편입 전까지의 서울대학교에서의 성적을 고려하여, 모두 70단위가 인정되었는데, 70단위는 당시 미국 대학교 학제로서 약 2년 반 정도에 해당하므로, 그는 3학년 과정에 바로 진학할 수 있는 셈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 이전에 일어나 7시 10분에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학교 수업을 듣기 시작하여, 수업이 끝나고 도서관에서 과제를 모두 끝내고 자정이 넘어 기숙사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하였다. 그는 미국으로 건너온지 1년 반만인 [[1956년]] [[6월]]에 [[물리학]]과를 최우등({{lang|en|[[Wiktionary:summa cum laude|summa cum laude]]|숨마 쿰 라우데}})으로 졸업하였고, 학과장 등의 추천으로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ref name="l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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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대학원에 진학하기까지 여름방학 기간은 아주 자유로웠는데, 그는 [[인디애나 주]]의 [[퍼듀 대학교]] 대학원의 여름 학교({{lang|en|[[:en:Summer school|Summer school]]}}<ref group='주'>{{llang|ja|若手夏の学校|와카테 나쓰노 각코}}</ref>)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또한 이 기간에 자동차 운전도 배웠다.<ref name="lhs"/>
 
이휘소는 여름방학이 끝난 [[1956년]] [[8월]]부터, [[피츠버그 대학교]] 대학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교육조교]]({{lang|en|TA}}) 장학생이어서, 공학과와 의예과 학생들의 물리학 실험 TA를 담당하였다. 이듬해 가을학기부터는 연구조교({{lang|en|[[:en:Research assistant|Research assistant]]}})와 {{lang|en|TA}}를 겸하게 되었고, 실험 지도만 하던 것에서 정식으로 강의 하나를 배정받게 되었다. 그가 가을학기에 수강하던 몇 개의 강의 중, 원자핵 이론 강의를 담당했던 시드니 메슈코프({{lang|en|Sydney Meshkov}})는 이후 이휘소의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무렵 이휘소는 물리학에서 본격적으로 소립자 이론물리학, 정확히는 [[양자장론|장의 양자론]]의 전공을 희망하게 되었다.<ref name="lhs"/>
 
이휘소는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에서, 차점 합격자와 총점이 20점 이상 벌어지는 높은 점수로 수석 합격하였다. 이후 몸이 쇠약해져 기관지염으로 고생하였다. 그는 몸을 추스른 후, 바로 석사 학위 논문에 매진하여, 한 달 가량 후에한달여만에 완성하였다. 학위 논문 제목은 〈[[산란행렬]]의 해석적 특성과 그 응용〉({{lang|en|On the Analytic Properties of the <math>S</math>-Matrix with Some Application}})이었다. 그는 이렇게 [[1958년]]에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석사 학위 논문을 좀더 다듬어서, 그 해 [[12월]]에 《[[피지컬 리뷰]]》에 기고하기도 하였다.<ref>{{cite journal
|lang=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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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그는 이미 [[피츠버그 대학교]]의 박사 진급을 앞두고 있었지만, 메슈코프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며 그를 명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에이브러햄 클라인({{lang|en|Abraham Klein}})에게 추천하였다. 클라인은 이휘소의 재능을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 학위 자격시험인 예비시험을 면제받도록 해주었으며, {{lang|en|TA}} 및 {{lang|en|RA}} 장학금보다도 더 혜택이 좋은 해리슨 연구장학금({{lang|en|Harrison Fellowship}})을 주선해주기까지 했다.<ref name="lhs"/>
 
클라인은 당시 서른 세살의 젊은 교수였는데, 이휘소는 클라인과 함께 공동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면서수행하면서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 조금씩 접근해 나갔다. 그러다 [[1960년]] [[11월]]에 〈<math>K^+</math> 중간자와 핵자 산란 현상의 이중 분산 관계〉({{lang|en|Study of <math>K^+ N</math> Scattering in the Double Dispersion Representation}})으로 물리학 [[박사]]({{lang|en|[[:en:Doctor of Philosophy#United States|Doctor of Philosophy]]}}) 학위를 받았는데, 이때이 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그가 박사 학위증을 공식적으로 받은 것은 [[1961년]] [[2월 4일]]이었다. 박사 논문 디펜스가 끝난 11월부터 [[1961년]] [[8월]]까지, 이휘소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박사후 연구원 및 전임 강사로 임용되었다.<ref name="lhs"/>
 
이후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초빙되었는데, 그 임기는 1년이었다. 임기가 이후부터의끝난 직장을후부터의 생각하지직장생활을 않으면고려해야 안되었지만했지만, 그는 파격적으로 [[1961년]]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임용되었는데, 이는 클라인의 배려였다. 이렇게 그는 조교수로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회원으로 방문 연구를 하는 형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임기가 끝난 이후의 걱정이 필요없게 되었다.<ref group='주'>당시 젊은 연구자로서 이휘소가 가진 위상을 짐작할 만한 대목이다.</ref>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로 떠나기 전, 미국 각지 대학의 교원으로 임용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될 또래 동료들과 함께 기념 삼아 군론의 소립자이론에의 응용에 관한 공동 논문을 집필하였고, 이를 《[[피지컬 리뷰|리뷰 오브 모던 피직스]]》에 기고하였다.<ref>{{cite journal
|lang= en
|꺾쇠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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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가을, 이휘소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자연과학부의 연구회원이 되었다. 그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아인슈타인 가 31번지에 위치한 미혼자용 기숙 아파트에 거처를 정했다. 이휘소는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무렵, 이휘소는 [[양-밀스 이론]]의 양자화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ref group='주'>비가환 [[게이지 이론]]인 [[양-밀스 이론]]까지도 아닌, [[양자전기역학]]과 같은 가환 [[게이지 이론]]의 양자화 문제만 하더라도 [[정준 양자화]]로도, [[경로적분]] [[양자화]]로도 상당한 테크닉을 요하는 고난도 작업이다.</ref><ref name="lhs"/>
 
이듬해 2월에 뉴욕 [[맨해튼]]의 [[컬럼비아 대학교]]의 주임교수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가 이휘소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컬럼비아 대학교]]의 조교수로 채용하고 싶다고 제안해왔다제안해 왔다. 그러나 이휘소는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오기 전부터 이미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어 있었기에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휘소는 자신을 조교수로 만들어주었던 클라인에게 연락하여 이 문제에 관해 상의하였는데, 클라인은 이휘소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임기를 경력으로 인정하여, [[펜실베이니아 대학교]]로 복귀하는 대로 부교수로 승진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이에 이휘소는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게 되었다.<ref name="lhs"/>
 
이휘소는 [[필라델피아]]를 떠나 [[프린스턴]]으로 올 무렵 [[말레이시아 화교]] 마리안 문 칭 심과 교제를 시작하였고,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근무할 때 한달에 한두 번 정도의 주말에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마리안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다 [[1962년]] [[3월]]에 둘은 약혼하였고, 미국 이민국에서 이휘소의 영주권이 나오는 대로 결혼하기로 했다.<ref group='주'>마리안은 당시 [[머크]]사 연구소의 세균학자로 근무하면서 여자 의과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교환 비자(J-1 비자)로 미국에 왔기 때문에 체류 기간이 2년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휘소가 미국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면, 이휘소의 배우자로서 마리안 또한 자동으로 거주 허가가 나도록 되어 있었다. 이후 마리안은 의과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이휘소의 내조에 전념하기 위해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기만 하고 따로 개업의 활동은 하지 않기로 했다.</ref> 이 해 [[5월 7일]]에 이휘소는 워싱턴에서 마리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 제프리 파운틴 리와 딸 아이린 앤 리를 두었다.<ref name="l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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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가을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양전닝]]이 이휘소를 찾아왔다. 그는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석좌교수({{lang|en|Albert Einstein Professorship of Physics}})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이휘소에게도 함께 가자고 권유하기 위해서였다.<ref group='주'>이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측에서는 그의 잔류를 희망하였으나, 클라인 교수는 마음이 끌리는 대로 하라는 편안한 대답을 해주었다고 전해진다.</ref> 이휘소는 [[1966년]] [[5월 16일]]에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 방문 교수로 초청되어 [[8월 31일]]까지 재직하였으며, 가을학기가 시작되고 [[9월 25일]]부터 [[양전닝 이론물리학 연구소]]의 정교수로 부임하였다.<ref group='주'>[[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으로 전직하면서 처음으로 단독주택을 마련하게 되었는데, 자택은 연구실에서 자동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으며,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은 [[맨해튼]] 옆의 [[롱아일랜드 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자동차로 15분 정도만 달리면 [[대서양]]에 이를 수 있었다. 또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맨해튼]]에도 접근할 수 있었다.</ref><ref name="lhs"/>
 
당시에는 논문 원고를 제출하여 심사가 끝나 학술지에 게재될 때 까지는 최소 반 년 정도가 걸렸으며, 《[[피지컬 리뷰|피지컬 리뷰 레터]]》만 해도 최소 한 달 이상은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입자물리학은 연구 템포가 그 어떤 학문보다도 빠른 편이라 논문 한 편을 학술지에 발표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논문이 나오기 전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에,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 반론을 인용한 논문을 이미 썼을 가능성이 충분했다.<ref group='주'>또한 잘못된 논문으로 판명될 가능성도 있었다.</ref> 이 때문에 학술지에 실리기까지 마냥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관심을 가진 학자들에게 연구 내용을 미리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인터넷이 보편화된 요즘에야 {{lang|en|[[arXiv]]}}라는 웹사이트가 존재하여, 전 세계의 인터넷이 사용 가능한 어떤 물리학자들도 거의 모든 [[출판 전 논문|프리프린트]]들을 쉽게 찾아서 몇 초 만에 바로곧바로 내려받아 읽어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인터넷이 보급되기보급되기도 수십년훨씬 전이었던 당시에는 {{lang|en|[[arXiv]]}}와 같은 혜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당시에는 모든 물리학자들이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에서 운영하는 스탠퍼드 물리학 정보 검색 시스템({{lang|en|[[:en:Stanford Physics Information Retrieval System|Stanford Physics Information Retrieval System]]}})에 사본을 보내 등록하고, 그곳에서 발간하는 [[출판 전 논문|프리프린트]] 리스트를 정기적으로 구독하였다. 그러다가 리스트에서 관심이 가는 논문을 발견하면, 저자에게 엽서를 띄워 사본을 요청하고, 그러면 그 저자의 호의로 사본을 겨우 받아볼 수 있는 형태로, 논문을 받아보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당시 이휘소는 엄청난 분량의 [[출판 전 논문|프리프린트]] 모음집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를 바탕으로 세계 각국의 석학들을 찾아다니며 교류하고 공동 연구를 수행하며 많은 지식을 쌓았다고 전해진다.<ref name="lhs"/>
 
[[파일:Steven-weinberg.jpg|thumb|[[스티븐 와인버그]]|left]][[1967년]] [[11월]]에, [[스티븐 와인버그]]는 《[[피지컬 리뷰|피지컬 리뷰 레터]]》 에 짧은 논문<ref name="Wein1">{{cite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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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s=1264–1266
|doi=10.1103/PhysRevLett.19.1264
}}</ref>을 발표했고, 이휘소는 논문 게재 심사를 의뢰받아 이를 읽게 되었다. 와인버그는 이 논문에서 약한 상호 작용에 관한 설명을 시도하였다. 약한 상호 작용은 자연계의 네 가지 상호 작용 중 하나인데, 이러한 네 가지 상호 작용들을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빛알]], [[글루온]] 등의 [[게이지 보존]]들이다. 이들은 모두 게이지 대칭성을대칭성 가지고아래에서 존재하고 있는데, 대칭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일단 [[게이지 보존]]의 질량이 0이어야 한다. 그러나 약한 상호 작용을 중개하는 위크 보존만큼은 측정 결과 꽤 무거운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으며, 이는 그때까지의 통념으로는 선뜻 받아들여지기 힘들었다.힘들었고, 당시에는약한 이를상호 설명하기작용에 위해서관해서는 사람의현상론적으로만 손으로정리가 일부러되어 게이지있을 입자에뿐이었다. 질량을 끼워넣으려는 다소 거친 논문들이 범람했는데,무렵 [[스티븐 와인버그]]만큼은 [[자발대칭파괴|이 게이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졌다]]고 하여 거기서부터 게이지 입자의 질량을 자연스럽게 얻으려는 독창적인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그 논문에서 모든 계산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이 방법이 맞을 거라는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었다.<ref group='주'>방법이야 어찌되었든, 이것이 [[양자장론|장의 양자론]]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또한 [[재규격화]]가 가능함도 보여야 한다. 하지만 위크 보존이 큰 질량을 가졌다는 것이 밝혀지고서밝혀지면서 정상적인 게이지 대칭성이대칭성을 깨져가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재규격화]]는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ref><ref name="lhs"/>
 
이휘소는 [[1968년]]에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였다.<ref group='주'>이 시민권 취득 심사 때 그의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윌리엄 A. 바딘({{lang|en|[[:en:William A. Bardeen|William A. Bardeen]]}})이 이휘소의 인성(人性) 증언을 하기도 했다.</ref> 그는 미국 시민이 된 직후, 이듬해인 [[1969년]]까지 [[구겐하임 펠로십]]([[1968년에 수여된 구겐하임 펠로십의 목록]], No.128)으로 일했는데, 이 기간에 그는 그는 프랑스에서 가족과 함께 [[휴가]]({{lang|en|[[:en:Leave of absence|Leave of absence]]}})를 보내면서 파리 제 11대학교({{lang|en|[[:en:Paris-Sud 11 University|Paris-Sud 11 University]]}})에서 세미나를 갖기도 하고, [[고등연구원 (프랑스)|프랑스 고등연구원]]에서 자유롭게 연구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자발 대칭 깨짐|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지는 현상]]과 그에 의한 [[난부-골드스톤 보손]]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머리 겔만]]과 모리스 레비({{lang|en|Maurice Lévy}})가 정립한 선형 [[시그마 모형]]의 [[재규격화]]에 관한 몇 편의 논문을 집필하였다.<ref name="sigma1">{{cite jour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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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f><ref name="lhs"/>
<!--이휘소는 [[1969년]] [[8월]]에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고에너지 물리학회에서 처음으로 좌장을 맡았다.{{출처}}-->
 
[[1970년]] [[6월]], 이휘소는 [[코르시카]]의 카르제스({{llang|fr|[[:en:Cargèse|Cargèse]]}}) 여름학교에 강연자로 초청되었다. 이곳에서 이휘소는 시그마 모형의 자발적으로 부서진 대칭성과 그 [[재규격화]]에 관해 강의하였다. 당시 네덜란드의 젊은 대학원생 [[헤라르뒤스 엇호프트]]는 지도교수였던 [[마르티뉘스 펠트만]]과 함께 [[양-밀스 이론]]의 재규격화에 관해 연구하고 있었고, 그도 여기서 이휘소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훗날 회고하였다.<ref name="l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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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essdate=2011-05-22
|month=12월
|year=1999년}}</ref> 카르제스 여름학교에서 돌아오고 얼마 안 있어서는, [[소비에트 연방]] [[키예프]]에서 열린 제15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며 처음으로 공산권 국가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이 회의는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개최되었다.<ref name="kiev">
{{cite journal
|lang= 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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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미 연구소]] 재직 시기 ===
[[파일:Fermilab.jpg|thumb|left|300px|페르미 연구소]]
이휘소는 [[1973년]] [[9월]]에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으로 부임하였고, 이 해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브룩헤븐 국립연구소]] 고에너지 자문 위원을 맡았다. 이 무렵에는 곳곳에서 그를 스카우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는 [[1973년]] [[5월 23일]]자로 그에게 물리학과 교수직을 제안한다는 편지를 발송하였고, [[페르미 연구소]]에서도 이론 물리학 부장({{lang|en|Head of the theoretical physics department}})직을 제안하였다.<ref group='주'>심지어는 이미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한 몇 개월 후인 [[11월 29일]]에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게이롤드 P. 및 메리 루이지 한웰 석좌교수직({{lang|en|Gaylord P. and Mary Louise Harnwell Professorship}})으로 초빙한다는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ref> 이휘소는 [[양전닝]]과 상의한 끝에 [[페르미 연구소]]로 이직하기로 했다. 그는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에 취임하면서, [[1974년]] [[4월]]부터 [[시카고 대학교]]의 교수도 겸임하기로 했다. 봉급은 [[페르미 연구소]]에서 받고, [[시카고 대학교]]에서는 일종의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로 했는데, 이휘소만 원한다면 언제든 전임교수가 될 수도 있었다. [[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는 [[1966년]] [[8월 31일]]부터 이휘소를 휴직 처리해주며, [[1974년]] [[9월 25일]]부터 물리학과 선도 교수({{lang|en|leading profesorprofessor}})에 임용하는 특별 대우를 해주어 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마음을 대신하였다.<ref group='주'>이와 같은 조치는 [[1976년]] [[8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ref> [[페르미 연구소]]의 이론 물리학 부장으로 재직하며, 이휘소는 이곳에서의 거의 모든 이론 연구에 관여하고, 실험 계획 수립에도 참여하였다. [[1974년]] [[6월]]부터는 [[스탠퍼드 선형 가속기 센터]]의 과학정책위원회 자문위원을 맡았다. 이 임기는 [[1978년]] [[8월]]까지였다.<ref name="lhs"/>
 
[[1974년]]에 이휘소는, [[영국]] [[런던]]에서 [[7월 1일]]부터 [[7월 10일]]까지 개최된 제 17회 [[고에너지 물리학 국제회의]]에 참가하였다.<ref name="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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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의 물리학자로 [[표트르 레오니도비치 카피차]]가 있다. 그는 [[1918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 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대에 [[대영제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등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ref group='주'>그는 극저온 물리학계에서 활약하여 당시 세계 최초로 액체 헬륨을 생성해내는데 성공하였으며, 후일 그것의 초유동성을 발견하기도 했다.</ref> 자연스럽게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수한 인재인 그가 모국에서 연구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련에 억류될 것을 염려한 카피차는 신변 보장이 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절했는데, 스탈린은 이에 직접 신변 보장 각서를 써 주면서까지 모국 방문을 종용했다. 그렇게 하여 카피차는 매년 여름 스탈린의 각서를 받고서 소련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어느 해에는 카피차의 여름 방문 시기가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신변 보장 각서가 도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사관 관리는 행정 처리가 늦어지고 있는 것일 뿐이니 걱정 말고 우선 소련으로 출발하라고 재촉하였다. 이미 여러 번 소련을 왕래한 바 있는 카피차는 별 의심 없이 귀국길에 올랐지만, 아니나다를까 그 길로 결국 소련에 억류되고 말았고 꼼짝없이 평생을 그곳에서 지내면서 연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ref name="lhs"/>
 
이휘소는 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박정희]] 독재 정권 하의 한국 방문에 대해 더더욱 경계심을 갖고 있었다.<ref group='주'>[[1973년]]에 모처럼 일본 [[교토 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박정희]] 독재정권을 경계하여 일부러 귀국하지 않고, 다소의 불효이긴 하나 모친을 일본에 모셔서 그곳에서 모자 상봉을 했을 정도였다.</ref> 하지만 이번에는 개인 자격이 아니라 미국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박정희]]는 이휘소에게 스탈린이 카피차에게 저질렀던그랬던 것과것처럼 같은마음대로 허튼이휘소에게 짓을손을 하지는뻗지는 못할 상황이었다. 그래도그럼에도 이휘소는 만전을 기하여 신변 보장이 확실한 [[주한미군]] [[용산기지]] 옆의 [[주한 미국 대사관]] 직원 숙소에 묵기로 하였으며,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자신이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만에 하나 박정희가 자신에게 허튼손을 수작을 부려서 어떤 식으로든 그와의 접촉이 생길 경우, 반드시 즉시 도움을 요청해야 할 곳들의 연락처를 페르미랩의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두고서야 겨우 한국으로 떠났다.<ref group='주'>그는 학술회의, 연구방문 등으로 외국여행이 빈번했지만, 이 모국 출장 건처럼 직접 세심하게 챙긴 적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고 알려진다.</ref> {{lang|en|USAID}} 차관 지원의 타당성 조사가 어느 정도 틀이 잡힌 후, 이휘소는 부인 마리안과 두 자녀를 데리고 서울특별시 은평구 대조동의 친가에 가서 며칠간 묵었다.<ref name="lhs"/>
 
그는 [[1976년]]에 다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연구회원으로 초청되었으며, 또한 이 해에 [[미국 예술-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amacad">{{웹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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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 [[1994년]] [[1월]]호에 실린, 〈내가 아는 고 이휘소 박사〉라는 강경식 전 [[브라운대학교]] 교수의 특별기고문에는 당시 이휘소의 비서가 사고 직후 강경식에게 전화를 걸어 설명한 사고 당시 상황이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이휘소는 [[1977년]] [[6월 16일]] 12시가 되기 전에 가족들을 태우고 [[콜로라도 주]] 아스펜 시로 출발했고, 그로부터 약 1시간 30분 간, [[일리노이 주]] 내의 고속도로 {{lang|en|I-80}}의 [[아이오와 주]] 경계로부터 약 30마일 떨어진 지점까지 정규속도 55마일로 운전해 가고 있었는데있었다. 그러다 오후 1시 22분 경, 건너편 내부고속도로선을 동쪽으로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의 타이어가 터지면서 중심을 잃어 조정을 못하고 중앙분리지역을 넘어와 서쪽으로 달리고 있던 이휘소의 차량의 운전석을 덮쳤다. 이 사고로 이휘소의 가족들은 경상을 입었지만, 본인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ref name="kang">{{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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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 내가 아는 故 李輝昭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