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임전보국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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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0월 22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조선임전보국단 출범식이 열렸고, 2천4백만 반도민 모두 일치결속하여 성전완수를 통해 황국의 흥융을 기할 것을 맹세하는 선서문도 낭독되었다. 산하에 여성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를 두는 등 약 1년 동안 활발한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회장직을 사양한데 이어 임전보국단 행사에 여러번 불참하여 논란이 되었다.
 
== 친일 활동 일부예시 ==
오긍선(1878~1963)은 1902년 미국에 유학하여 1907년 3월 루이빌 의대를 졸업하고 10월 미국남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귀국했다. 군산, 광주, 목포의 야소교병원 원장을 지내고 1912년부터는 세브란스의전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1921년에는 학감, 그리고 1934년에는 에비슨을 이어 세브란스의전의 제2대 교장이 되었다. 오긍선의 친일 활동은 비교적 일찍 시작된다. 1921년, 3·1운동 이후 민심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친일 세력이 조직한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24년 "내선융화의 철저한 실행"을 내걸고 결성된 동민회(同民會)에도 참여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총독부의 교육 자문 기구인 조선교육회의 평의원을 지냈고 1937년에는 경성군사후원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1938년에는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의 발기인과 실행위원을 맡았으며 종교 활동을 통한 황민화 운동을 목표로 하는 조선기독교연합회의 평의원으로 참여했다. 또 사상범의 전향을 촉진하는 경성보호관찰소의 주임대우 촉탁보호사로도 활동했다. 1939년에는 조선인의 지원병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조직된 경성부지원병후원회 이사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상임이사를 맡았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평의원이 되었다. <반도의 빛> 1942년 1월호에 "임전하(臨戰下)에 신년을 마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여 "전선에서 싸우는 장병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 말며, 후방에 있는 우리는 각각 자기가 하는 '직무의 군인'임을 한층 더 각오하라"고 했다. 1943년 11월 6일자 <매일신보>에 학도지원병 지원 촉구를 위한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는 특집에 "환하게 열린 정로(征路) ― 주저 말고 곧 돌진하라"를 기고하여 '대동아 건설'을 위해 적국인 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결전장으로 주저 없이 나설 것을 촉구했다. 오긍선은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