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하드리아노 2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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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왕국과의 문제는 [[로타링기아]]의 [[왕]] [[로타르 2세]]가 정실부인 토이트베르가와 헤어지고 애첩 발트라다와 행한 결혼에서 기인되었다. 하드리아노 2세의 노력은 아무 결과를 내지 못하였다. 문제는 로타르 2세가 죽음으로써 깊어졌는데 [[로타링기아 왕국]]에 내분이 일어나자 하드리아노 2세는 [[랭스]]의 힝크마르의 조언을 받던 [[카를 2세 (서프랑크)|샤를 ''대머리왕'']]을 물리치고 루트비히 2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소위 [[독일]]의 [[프린스|왕자]]들, 샤를과 [[프랑크의 루트비히 2세|독일왕 루트비히]]가 [[870년]] [[메르센 조약]]을 맺을 때 [[신성로마제국의 루트비히 2세|황제 루트비히 2세]]는 제외되었다.
 
[[비잔티움 제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드리아노 2세는 부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869년]] 6월 로마에서 개최된 지방 [[공의회]]는 [[포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단죄하고, 교황은 사절 3명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파견하여 로마 교회의 뜻을 전했으나 [[발칸 반도]]에서의 로마 교회의 [[사목권]] 주장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강요에 의해 퇴위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그나티오스는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의 초청을 받아들여 그 나라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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