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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장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미나모토노 요리이에(源頼家)]]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것을 막기위해 중신들이 모여 [[1199년]] '[[십삼인의 합의제|십삼인의 합의제(十三人の合議制)]]'를 설치한 것이 그 유래가 된다. 효조슈라는 정식 기구 명칭이 된 것은 [[1225년]] [[후지와라 씨|후지와라 섭정가문]]에서 양자로 들어와 제4대 [[세이이대장군]] 자리에 앉은 [[후지와라노 요리쓰네|후지와라노 요리츠네(藤原頼経)]]를 보좌하기 위해 [[호조 야스토키]]가 유력 [[고케닌]] 집안 사람들로 구성된 정치적 합의체를 운영한 것이 그 시초가 됐다. 효죠슈가 설치됐던 해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와 [[오오에노 히로모토]]가 사망한 해이기도 하였고, 가마쿠라 막부의 공신 1세대가 전체적으로 정계은퇴를 하는 시점이기도 했다<ref>아즈마카가미(『吾妻鏡』),가로쿠(嘉禄) 원년 [[12월 21일]] 기록에서 발췌 (사사키 후미아키(佐々木文昭) 가마쿠라막부 협의기구의 성립과정(「鎌倉幕府評定制の成立過程」) 일본사학잡지(『史学雑誌』) 92편 제9호(1983년 발행), 중세공무신제의 연구(『中世公武新制の研究』) 요시카와 코분칸(吉川弘文館) 2008년 발행 ISBN 978-4-642-02877-6 제2부, 4장 게재</ref>.
 
가마쿠라 막부 공신 2세대로 구성된 새로운 정치적 협의체제인 '효죠슈'는 의장을 [[싯켄|싯켄(執権)]]이라 했으며 가마쿠라 막부 탄생에 공이 컸던 호조(北條)씨가 남북조 시대 내내 그 자리를 주로 차지했다. 그나마도 가마쿠라 막부 후기에 들어서자 호조씨 종가 모임인 [[도쿠소|도쿠소(得宗)]]를 중심으로 모인 호조씨가 막부 기관인 효조슈의 합의 과정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효조슈는 유명무실해졌다. 아시카가(足利)씨가 쇼군이 된 무로마치 시대에도 막부정치의 기관으로 존재는 했으나 실질적인 힘은 없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서는 가마쿠라 때와 같이 아시카가(足利)씨 일족에게 명예직의 하나로 더해지는 경향이 강했고, 정치기구로서 효죠슈가 아니라 관직 이름으로서 효죠슈를 내려줬으므로 따로 싯켄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직으로서 효조슈는 기라씨(吉良氏)나 헤께이야마씨(畠山氏) 같이 아시카가 일족 중에서도 세이이대장군과[[세이이대장군]]과 매우가장 가까왔던 두 집안 중 하나가 맡았으며 이 두 집안 출신이 아닌 효죠슈를 따로 '출세효조슈'로 불러 차별을 두었다.
 
== 가마쿠라 막부 시대 효죠슈 명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