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C. 스테니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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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테니스'''(John C. Stennis, 1901년 8월 3일 – 1995년 4월 23일)는 [[미시시피 주]] 출신 [[미국 상원|미국의 상원 의원]]이었다.
{{ㅅ|독자연구}}
'''존 스테니스 (John C. Stennis)'''
 
{{DEFAULTSORT:스테니스, 존 C.}}
#출처<ref>프랑수아 랑글레 지음, 《제국의 전쟁》, 소와당, 2012년, 250</ref>
[[분류:1901년 태어남]]
<references/>
[[분류:1995년 죽음]]
 
[[분류:미국의 검사]]
그는 미국 정치사에 한 획을 긋는 유명한 인물이다. 1947년 보궐선거를 시점으로 1989까지 단 한차례도 패배하지 않고, 미국 상원의원 자리를 차지하여, 미국 역사상 최장기 상원의원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상원의원 만장일치로 상원의장 대행이 되기도 한다. 상원 군사위원장 시절에는 해군의 군사력 증강에 이바지한 공로로 레이건 대통령으로부터 "미 현대 해군의 아버지(The father of America's Modern Navy)"로 평가 받기도 했다.
[[분류:버지니아 대학교 동문]]
 
[[분류:미국의 연방 상원의원]]
또한 그는 미국 흑인인권운동사에 부정적 의미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기도 하다. 1932년부터 미시시피 주 검사로 일하면서 흑인피의자에 대해 협박과 고문을 통한 유죄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흑인 피의자에 대한 협박과 고문은 1936년 미대법원이 Brown v. Mississippi 사건의 판결을 통해 고문을 통한 증거취득은 불법이며,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고 선언하기까지 계속된다.
 
1950년대는 미국 흑인민권운동 사상 중요한 시절로 기억된다. 흑인소녀의 백인공립학교에의 등교를, 미국 전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주의에 익숙해지고, 훗날 인종차별에 의해 상처 받지 않게끔 면역을 주려는 조치라며, 거부한 교육위원회에 결정에 대해 미 대법원이 이전의 판례들을 뒤집고 위법 판결을 내린 해이기도 하다.
 
이를 비롯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흑인과 소수인종의 투표권을 갖은 편법으로 방해하던 미국 남부의 주들의 법령들을 극복하고, 그들의 선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투표권법 (Voting Rights Act) 또한 1950년대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으며, 이 논의에서 반대론자의 중심에 존 스테니스, 그가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한 반대론자들의 적극적 반대에 밀려 이 법안은 10여년이 지난 1965년에야 미 상원을 통과하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나, 시한을 정한 시한부 법령이 되고 만다. (최근 미국 상원은 이 법안에 대한 시한연장을 결의했다)
 
그는 추종자들에 의해 "힘에 의한 평화" 주창론자로 불리운다. 그의 추종자 중 하나인 로널드 레이건은 그의 이름을 미국의 니모츠급 항공모함 이름으로 명명하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존 스테니스와 로널드 레이건의 '힘에 의한 평화정책'의 후계자이자, 미 군산복합체의 대리인이기도 한 조지 부시 대통령과 관련깊다.
 
※ 존 스테니스가 과거 여성과 소수자를 위한 법안을 발의하고, 미국 최초의 흑인 하원의원인 마이크 에스피(Mike Espy)의 당선을 돕기도 했지만, 이는 그의 인종차별적 성향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는 것을 막기 위한 고도의 정치전략이었다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존 C.스테니스호 - 니미츠급 핵추진 항공모함 CVN-74'''
 
길이 332m, 폭 78m.
2700여개의 객실과 5천여명의 승조원.
슈퍼호넷(F/A-18E/F)과 호넷(F/A-18C),
조기경보기 호크아이(E-2C), 시호크 헬기(SH-60F) 등을 탑재한
떠다니는 군사기지,
 
'09 키리졸브 한미연합훈련에 참가한 美 항공모함 '존 스테니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