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사설: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23번째 줄:
 
=== 시대와 역사에 대한 관점 ===
「인사문」에서 이익은 왕세자에 대한 엄격한 교육, 서얼에게도 길을 열어줄 것과 조상의 내력을 따지는 서경제도를 없애고 과거제와 천거제를 함께 사용하며, 군현마다 무학(武學)을 두어 장교를 양성할 것과 중앙 관청의 통폐합, 화폐 유통의 문제점과 사치 풍조의 근절을 주장하고, 특히 노비제를 '천하의 악법'이라 규정하고 "노비를 대대로 천하게 전하는 것은 고금에 없던 일이다!"라며 노비 제도의 존속을 강하게 비판한다. 또한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 좀(육두)을 설정하고, 노비제와 과거제, 벌열(閥閱), 교묘한 재주와 솜씨, 승려, 게으름뱅이를 당시 사회의 대표적인 폐단으로서 국가와 사회를 좀먹는 암적인 존재로 인식했다. 역사에 대해서도 이익은 역사서 저술이 매우 어려운 작업과 동시에 자료에 엄밀한 고증을 행할 것을 강조한다. 독특한 견해를 많이 내놓았는데, [[단군조선]]의 국호를 '단(檀)', [[기자조선]]의 국호를 '기(箕)'로 보고, [[삼한|삼한(三韓)]]의 원주민을 중국 전국시대 [[한나라 (전국시대)|한(韓)]]의 이주민으로 해석한 것이 그것이다. 이밖에 조선의 역사가 중국의 요순시대와 비길 만큼 오래되었고, 순이 동이족임을 강조하면서도 중국의 교화가 우리 나라에 미친 점을 간과하지 않았는데, 이는 결론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18세기 초·중엽의 역사학 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 가장 세련된 문헌고증학적 방법론, 내지는 한·중 양국의 문화 교류를 보다 폭넓게 이해한 토대 위에서 도출된 견해들이라는 점에서 그 선진성이 인정된다. 이러한 그의 역사관은 제자 안정복에게 이어져 《[[동사강목]]》이 탄생하는 한 배경이 되었다.
 
===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한계 ===